2017 법무사 2월호

10 상했죠. 그러다 저도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에 멀리 교회 의 종소리가 들려 눈을 떴다가 순간 하나님의 음성을 들 은 겁니다. “왜 네가 이 아이들을 이끌어가지 못하고, 아이 들의 비참한 상황으로 떨어지려 하느냐.” 저는 지금도 매 일 아침 그 음성을 기억해요. 깜짝 놀라 일어나 기도하면 서 깨달았죠, 이 일이 바로 내 일이고, 평생토록 이 아이들 과 함께 살겠다고. 막사이사이상수상금으로특수학교건립 Q 전쟁 통이라 물자도 식량도 귀할 때인데, 아이들 먹 이고 입히고 보살피는 일이 정말 쉽지 않았겠어요. 1952년 11월 27일에 애광영아원이 문을 열자 거제도의 전쟁고아 아기들이 삽시간에 몰려들었어요. 당시 거제도 에 대여섯 개의 고아원이 있었지만, 갓난아기를 돌보는 곳 은 애광영아원이 유일했거든요. 그래서 매일 먹을 것을 구 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죠. 이듬해 봄에는 갑자기 홍역이 돌아서 급성폐렴에 걸린 아이들이 속출했어요. 거제도에는 병원도 의사도 없었기 때문에 보모들과 아이들을 들춰 업고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탔지요. 당시 부산으로 가는 연락선은 하루에 2번 있었는 데, 기상 상황이 좋아야 부산까지 3시간 반이 걸렸어요. 결국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한 아기들이 품 안에서 죽기 도 했는데, 그래도 살아있는 아이들은 치료를 해야 하니 죽은 아이를 그대로 업고 부산대학병원으로 아동자선병 원으로 쫓아다녀야 했지요. 그렇게 정신없이 봄이 가고 여름이 되자 전쟁이 끝나더 군요. 거제섬을 덮었던 그 많던 피난민들이 고향을 찾아 떠나고 반공포로도 석방되고, 모두가 떠나고 나니 식량을 구하기가 더 힘들어졌어요. 고민 끝에 고현 포로수용소를 찾아가 낮에 일해 번 돈 으로 아이들 먹일 식량을 사려고 하니 일자리를 달라고 통사정을 했지요. 잠자코 말을 듣던 당직자가 차에 타라고 하더니 도착해 보니 도로 우리 영아원이더라고요. 또 그렇게 며칠이 지났는데, 그날도 양식을 구하러 돌아 다니다 돌아왔어요. 그런데 입구에 웬 못 보던 짐들이 잔 뜩 쌓여 있는 거예요. 열어보니 안에 밀가루와 우유, 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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