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법무사 2월호
11 법무사 2017년 2월호 등 먹을 것들이 가득한데, 어떤 미군 트럭이 물건들을 내 려놓고는 모레 다시 오겠다며 돌아갔다는 거예요. 정말 이틀이 지나자 미군 트럭이 나타나 또 한가득 음식 과 물건들을 내려놓으면서 돈이 필요하면 이 물건들을 팔 아서 쓰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한동안 미군이 주고 간 물 건들로 아이들을 먹였어요. 기적 같은 일인데, 나중에 알 고 보니 미군이 철수하면서 남은 물건을 고아원에 준다며 애광원을 물어서 찾아온 것이더군요. Q 애광원의 역사에서 많은 분들의 온정과 사랑의 손길 이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럼요. 일일이 거론하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분들의 도 움이 있었지요. 처음 애광원을 있게 했던 김원규 선생님은 사회사업을 전공하지도 않았던 저를 사회사업가로 이끌어 주셨어요. 처음에 애광원 운영이 너무 어려워 서울로 이전 할까 하고 당시는 보건사회부 아동복지과 과장으로 계시 던 김 선생님을 찾아갔어요. 역시나 말을 꺼내자마자 벌컥 화를 내시더군요. 제가 거 제에 남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사 회사업에 관한 여러 조언을 해주셨죠. 김 선생님은 1940 년에 일본 메이지대학 사회사업학과를 졸업하고, 1954년 에 런던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하신 전문가셨어요. 그때 선생님의 조언을 듣고 거제에 남아 사회사업가가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낙후된 거제섬 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사회사업들을 시작하게 되었죠. 전 쟁미망인과 젊은 여성들의 직업교육을 위해 ‘애광직업보 도소’를 개설했고, 병원이 없던 거제도에 ‘애광기독병원’을 지었죠. 또, 가난한 농어민 자녀들을 위해 ‘애광기술학교’ 도 설립했습니다. 김 선생님은 1955년부터 시작해 2001년 돌아가시는 날 까지 거제도 애광원의 이사로 계시면서 큰 도움을 주셨습 니다. 우리 역사에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은인이지요. Q 전쟁으로 초토화된 시절에도 열정을 가지고 나라 를 재건하려 했던 분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뭉클합니다. ‘애광기독병원’을 건립할 때는 장기려 박사님의 도움도 컸다고요? 맞습니다. 장기려 박사님도 우리 애광원의 은인이시죠. 잘 알려졌다시피 장 박사님은 전쟁 중에 혈혈단신 월남해 평생을 부산에서 독신으로 지내며 가난한 환자들의 무상 치료에 헌신하셨던 분입니다. 우리 애광원에도 자주 들러 아이들의 건강을 돌봐주셨 는데, 1969년부터는 애광원 후원회장으로도 활동해 주셨 어요. 1971년 애광기독병원을 설립했을 때도 당연히 장 박 사님의 도움이 컸고요. 이런 활동들로 1979년에 막사이사 이상을 수상하셨지요. Q 김 원장님께서도 1989년에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 셨잖아요. 당시 받은 상금도 애광원에 기부하셨다고 들 었는데 그 사연이 궁금합니다. 당시 상금이 3만 달러였어요. 애광원이 1978년에 고아 원에서 지적장애인 거주시설로 전환을 했잖아요. 그때 경 상남도에 지체장애인 시설이 처음 생기다 보니 삽시간에 아이들이 늘어나 68명까지 되더군요. 그런데 아이들을 보 살피고 키우다 보니 단지 먹고 입히는 것에서 그칠 게 아 갑자기 홍역이 돌아 급성폐렴에 걸린 아이들이 속출했어요. 아이들을 들춰 업고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탔지요. 부산까지 가는 3시간 반을 견디지 못한 아기들이 품 안에서 죽었는데, 그래도 살아있는 아이들은 치료를 해야 하니 죽은 아이를 그대로 업고 병원으로 쫓아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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