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법무사 7월호
1908년이었다”고 적고 있는 점에서 명확히 알 수 있다. 윤내현(尹乃鉉) 교수도 일찍이 삼조선 설에 근본적인 문 제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삼국유사』는 단군조선과 기 자조선을 계승(繼承) 관계로 보지 않고 병존(倂存)관계로 보았는데, 위 기록이 옳다면 기자세력은 고조선 영토의 일 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기자의 후손 인 준왕이나 준왕에게 정권을 빼앗아 건국한 위만조선, 그 지역에 설치된 한사군 등은 단군조선 영토의 일부 지역에 설치되어 단군조선과 병존했다는 것이 된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서는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그리고 한사군의 위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 는데, 중국의 『한서(漢書)』 「지리지 (地理志)」, 『진서(晋書)』 「지리지」, 『통 전(通典)』, 『대명일통지(大明一統 志)』 등의 기록에 따르면 기자는 요 서 서부인 난하( 灤河 ) 하류 유역에 망명해 있었다. 위만조선은 이곳에 서 건국되어 지금의 요서지역으로 영역을 넓혔으며, 한사군도 요서지 역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 지역은 원 래 단군조선의 서부변경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제왕운기』 이래 통용되어 온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등을 계승관계로 본 고대사체 계가 잘못된 것이며,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병존관계로 본 『삼국유사』의 기록이 옳다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즉, 단군조선은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서부변경의 영토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사의 체계는 고조선(단군조선-기자국과 위 만조선, 한사군은 단군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에서 일어 났던 사건으로 취급), 열국시대(여러 나라), 사국시대(고구 려, 백제, 신라, 가야), 남북국시대(신라, 발해), 고려 등으로 체계화해야 한다는 것이 소수설의 핵심이다. 주변강국 역사왜곡, 속수무책 사학계 이러한 소수설의 입장에서 현재 다수설의 고대사체계 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다수설에 따른다면, 우리 민족 은 기자가 망명해 온 서기원 1100년 무렵부터 낙랑군이 축출된 서기 313~315년 무렵까지 1,400년 동안 중국인 들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전 에 단군조선이 존재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기게 되고, 설사 존재했다 하다라도 그 세력은 지극히 미약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은 역사의 초기 단계부터 중국 인들의 지배 아래서 성장한 무능력 한 민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 실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잘못된 것 이라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것이 다. 일제의 ‘단군신화론’이 한국사학 계의 정설이 되면서 고조선 연구가 사실상 거의 중단되었다. 만주지역 을 언급한 분은 신채호, 정인보, 장 도빈 등 소위 민족주의 사학자들뿐 이었다. 광복 후 우리 사학계는 그분 들의 연구를 인정하지 않았고, 독립운동가들의 애국·애족 심에서 나온 이야기 정도로 취급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 끊임없는 대화이다. ‘역사는 사실 의 나열이 아니라 사관(史觀)과 사실의 결합이다’라는 역 사학자 E. H. Carr의 주장은 모든 역사는 자국 중심의 사 관으로 기술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오늘날 사실 강대 국들은 예외 없이 자국의 미래 국익을 위한 역사기술에 전 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은 독도 영유권 억지와 위안부 부정에 이어 ‘임나본 부설(任那本府說)’까지 다시 자국교과서에 기재하기 시작 했다. 일본은 대륙침략의 사전작업으로 광개토대왕비문 조작을 체계적으로 진행한 바 있다. 또, 중국은 막대한 예 상고사문제는 한국뿐아니라중국·일본등 인접국이관계되어있고, 전세계학자들이주시하는 국제적이슈다. 그런의미에서세계적인 기준으로손색없는상고사논쟁이 벌어지기를기대한다. │문화의 힘│ 살며 생각하며 80
Made with FlippingBook
RkJQdWJsaXNoZXIy ODExNj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