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법무사 11월호
86 겁 기차를 타자 남자도 뒤따라가 옆자리에 앉습니다. 그 당시 완행열차는 지정석이 없었습니다. 먼저 앉는 사람 이 임자지요. 기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젊은이들은 모 두 다 장발이고, “땅콩 있어요, 오징어 있습니다” 외치며 홍익회 판매원이 지나갑니다. 70년대 말 80년대 초, 완행 열차 안의 풍경 그대로입니다. 너무 리얼하지요? 그런데 전편에 흐르는 「만추」의 영상은 낭만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김수용 감독의 이 영화를 ‘낭만적 리얼리즘’ 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늦가을 잎새 떠난 뒤 아무것도 남김 없고… 어느 섬, 등대 옆 무덤에 혜림은 꽃을 바치고 절을 합 니다. 무덤에 향을 피우고 그녀는 마른 풀을 부여잡고 통 곡합니다. 차갑게 닫혀 있던 한 여자의 내면이 폭발한 것 입니다. 영상이 한 폭의 그림입니다(정일성 촬영감독이기 에 가능한 씬이라고나 할까요?). 조금 떨어져서 한 남자 가 그것을 지켜봅니다. “나 같은 여자구나. 쫓겨다니며 사는 여자구나. 누나 같기도 하고.” 혜림은 조금씩 남자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합니 │문화의 힘│ 법률이 있는 영화 다. 각자 기구한 사연을 지닌 채 두 사람은 한 걸음씩 다 가섭니다. 손을 잡습니다. 몸을 기댑니다. 호텔에서 밤을 지새우기로 한 그날 밤, 남자는 사이사이 공중전화로 어 딘가로 전화를 해 대다가 갑자기 두 시간 내에 돌아오겠 다며 호텔을 떠납니다. 그러나 남자는 돌아오지 않고(범죄집단에 얽혀 있던 그는 그사이 한 사내를 칼로 찌르고 달아납니다), 혜림은 새벽 세 시 기차를 타고 떠나는데, 남자도 극적으로 그 기차를 탑니다(조금은 신파조인가요? 이 정도는 봐줄 만 하지요?). 동대구행 열차 안, “난 당신한테 마지막 내 인생을 걸 었어요.” 남자는 혜림에게 고백합니다. 혜림도 연하의 남 자에게 마음이 이끌립니다. 승강장에서 둘은 격렬한 키 스를 나누고, 마침내 열차가 사고로 멈춰 섰을 때 그들은 열차에서 탈출합니다. 기찻길 옆 야산 낙엽 속에서, 절박 한 두 사람은 생사를 잊은 채 격렬한 정사를 벌입니다. 남자가 함께 이대로 도망치자고 유혹하지만 혜림은 결 국 열차로 돌아옵니다. 마치 통곡의 벽처럼 높고 기다란 교도소 담벼락, 멀리 새벽은 밝아 오고 늦가을인 듯 초겨울인 듯, 차가운 바 람이 얼굴을 스치고 이제 둘은 한 시간이면 헤어져야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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