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법무사 11월호
87 법무사 2017년 11월호 니다. 교도소 앞 식당에서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따뜻한 가락국수를 함께 먹습니다. 남자는 혜림에게 말합니다. “천천히 먹고 있어, 잠깐 다녀올 테니까.” 남자는 이른 아침 닫혀 있는 상가를 무례하게 두드리 고 다닙니다. 운 좋게 문을 열어 준 상점에서 남자는 속 옷이며 양말이며 목도리며 닥치는 대로 삽니다. 상점을 나서는 순간 그는 형사들에게 체포됩니다. 상해 및 강도 혐의로. 그는 형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잠시 양해를 구 합니다. 이번에도 오지 않을까 걱정하던 혜림은 한 아름 선물 을 들고 나타난 남자를 보자 얼음 녹듯 마음이 놓입니다. 천천히 교도소 문으로 향하는 두 사람. 남자는 말없이 자신이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혜림에게 둘러 줍니 다. 교도소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순간, 혜림은 뒤돌아서 며 묻습니다. “이름을 모르잖아요.” “김민기.” “2년 후 오늘, 호숫가 벤치에서 기다리고 있겠어요.” 2년 후, 혜림은 호숫가 벤치에서 민기를 기다립니다. 우 연처럼 시작된 인연, 우연처럼 다시 만날 것이다. 그 사람 은 반드시 온다. 그때도 그랬으니까. 혜림은 수없이 마음속으로 되뇌며 오지 않을 그를 기 다립니다. 호숫가에 해 그림자는 길어지고 그는 끝내 모 습을 나타내지 않습니다(민기는 지금 형무소에 있어요! 소리치고 싶었지요). 김혜자의 연기는 그때도 빛났습니다. 호수의 은빛 물결 처럼 빛났습니다. 담배 피우던 모습도 이제는 원숙해졌습 니다. 영화 「만추」의 주인공은 혜림과 민기지만 어쩌면 민 기는 조연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추의 계보는 문정숙, 김 혜자, 탕웨이로 이어진 것이지요. 끝내 오지 않는 남자를 뒤로하고 혜림은 돌아섭니다. 2년 전, 한 남자, 연하의 남자로 인해 맺었던 인연이 파노 라마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흩날리는 낙엽처럼, 이제는 살을 에는 가을바람처럼. 플라타너스 터널을 걸어가는 혜림의 등 뒤로 김지하의 시 「늦가을」이 오버랩 됩니다. 늦가을 잎새 떠난 뒤 아무것도 남김 없고 내 마음 빈 하늘에 천둥소리만 은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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