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법무사 1월호
1960년, 법원최초의공채시험 필자는 1960년 봄, 전라도 곡성 태안사에서 고시를 준비하던중대법원의법원서기(현 6급법원주사) 발령 통지를받고동년 6월 13일대법원민사과에첫출근을 하였다. 당시 대법원 청사는 서울 서소문동 덕수궁 옆 (현재서울시립미술관자리)에있었다. 4층 건물에 불과했던 구(舊)청사는 대법원을 비롯해 서울고등법원, 서울지방법원 등 법원들과 대검찰청, 서 울고등검찰청, 서울지방검찰청 등 검찰청까지 모두가 들어와있던법조종합청사였다. 당시 법원에는 초대 김병로 대법원장과 일제강점기 때부터근무하던법관및일반직이근무하였는데, 법관 은 고등고시에 합격한 분들이지만 일반직은 채용시험 없이여러경로로들어온나이많은노장들이대부분이 었다. 1960년 법원직원 채용시험은 최초의 공개경쟁 채용 시험이었다. 이시험에서성적이우수한사람은직접서 기(현 6급 법원주사)로 임명되었고, 그 외는 서기보(현 9급 법원서기보)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마치 과 거 조선시대 과거시험 대과에 합격하면 성적순에 따라 종6품에서 종9품까지 차별하여 임명했던 것과 비슷하 다 해서 ‘법원 과거시험’으로 불렸다. 필자처럼 막바로 임용된 사람들은 자신이 ‘법원 과거시험’에 합격했다며 자랑을하기도했는데, 당시법원과거시험에합격해함 께 임용된 동기들이 김종홍, 신언숙, 부장호, 이덕수 법 무사등이다. 대법관옆에열석했던입회서기 법원서기로 첫발을 내딛게 된 필자는 입회서기로 일 을 시작했는데, 당시 법원 입회서기는 지금처럼 법대 아래에서가 아니라 법대 위에 대법관들과 나란히 열석 하여 재판에 입회하였다. 당시는 입회서기가 재판기록 을 본인 앞에 보관하고, 사건명과 당사자를 호명한 후 에야 재판장에게 가져다주는 역할을 하였는데, 법원의 이런시스템을잘모르던필자의고향지인들이우연히 그 모습을 보고는 필자가 사법고시를 준비하다 대법관 이 된 줄로 알고, 고향에 아무개가 대법관이 되었다고 소문을 내는 바람에 고향이 축제 분위기가 된 일이 있 었다. 대법관이 아니라 법원서기가 되었다고 해명을 해야 했던 필자는 그 사실이 참으로 멋쩍기도 하고 곤혹스 럽기도했던기억이난다. 그런경험때문이었던지이후 사표까지 내고 사법시험에 응시하였으나 결과는 계속 낙방하여 다소 씁쓸한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오랜 세 월이지난지금에와서는떠올리면새록새록웃음짓게 되는추억일뿐이다. 필자가 대법원의 법원서기로 발령 받은 날짜는 정확 히 1960년 6월 13일이었다. 사전교육도 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곧바로 임용되어 임용 3일 만에 당시 고재호 대법관의 입회서기로서 처음 법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교육도 실무경험도 없이 막바로 대법관의 입 회서기가 되고 보니 재판이 끝나고 사무실로 나왔어도 조서를 쓸 일이 막막하기만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법원의조서는하급심과달리크게어렵지도않은것 인데, 아무것도모르던당시에는그저겁이날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노장들인 선배 입회서기에게 도움을 청하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시험합격자가 그것도 몰 라?” 하는 말뿐. 고민고민하다가 하는 수 없이 고재호 대법관에게 이실직고하니 허허 웃으시며 직접 조서를 작성해 입회서기란에 서명 날인을 하라고 일러주었다. 선배들 입장에서는 막바로 입회서기로 발령을 받은 필 자가고울리없었던것이다. 85 법무사 2018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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