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검사실, 살인적 업무에 주말도 없어 1960년 2월, 필자는 대검찰청 중앙수사국 창설과 함 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치러졌던 검찰주사 채용시험 에 100 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했다. 당시 새로 설립되는 중앙수사국은 미국 FBI의 선진 적인 수사기법과 운영기업을 벤치마킹하는 한편, 신규 직원들에게 FBI 유학까지 보내준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어 필자는 최고의 수사요원이 되겠다는 큰 기대를 품고 시험에 도전했다. 하지만 필자를 비롯해 이 시험에 최종 합격한 24명 주사들의 야심찬 꿈은 곧 바람처럼 날아갔다. 얼마 후 5·16 군사 쿠데타가 발발해 중앙수사국의 업무가 정지 되면서 유학은커녕 ‘중앙도서관’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 도로 책이나 보는 한직으로 있다가 서울지검으로 전출 되었기 때문이다. 1961년 7월, 필자는 서울지검 검사실에 배속되었다. 검사실의 업무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끝도 없이 처리할 사건들이 밀려와서 평일 퇴근은 보통 밤 11시, 주말은 특근을 하며 보내는 것이 일상사였다. 당시 검사실이 업무과다에 시달린 이유는 검사와 참 여주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당시 전 국 검찰청의 검사는 220명에 불과했다. 간부 검사를 제외한 일선검사도 180명(그중 지금의 서울중앙·동부· 서부·남부·북부지검을 모두 관할하는 서울지검 검사는 30명도 안 됨)에 불과했으니 현재 2,000명이 넘는 검 사 수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업무 중 무장간첩으로 오해받기도 1966년, 필자는 사무관 승진시험에 합격해 6년간 전 념해오던 검찰업무와는 상관없는 묵호(현재 동해시) 출 입국 관리사무소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출입국관리소 는 본래 외무부 소속이었으나 1962년 법무부 검찰국으 로 이관되었다가 다시 법무실로 소속이 바뀐 다소 특이 한 부서였다. 당시는 사무관의 위상이 꽤 높았을 때라 지방에서는 사무관 기관장도 많지 않았다. 강원도 속초시장이 사무 관이었고, 묵호 역장이나 군 내무과장도 주사였다. 경 찰서장도 6급 주사 수준인 경감이 맡았을 정도니 당시 사무관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출입국관리소장을 마치고는 법무부 송무과에서 일 했다. 당시 맡은 일은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는 동안 혼란한 틈을 타 개인이 불법적으로 소유한 국유재산을 환수하는 업무였다. 이는 당시 저돌적인 성품으로 유명 했던 권오병 법무부장관이 직접 진두지휘하며 의욕을 보인 일이었다. 권 장관의 의욕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어느 날 자 신의 작은처남이 부산 도심 요지의 부친 소유 땅 1만여 평이 국고로 환수된다는 소식을 듣고 권 장관을 찾아왔 다가 두들겨 맞을 뻔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바싹 긴장한 송무과 직원들은 매주 일 요일 밤이면 여관에 모여 밤새도록 각 지검에서 올라온 실적을 집계해서 월요일 아침, 장관의 결재를 받아야 했다. 그 집계는 청와대에 직접 보고되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밤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난방 도 안 된 여관방에 4명의 직원이 모여 철거덕철거덕 소 리를 내는 구식 계산기를 두드리며 열심히 실적을 집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갑자기 문이 꽝~ 하고 부 서질 듯 열리더니 무장군인 몇 명이 뛰어들어 왔다. 우리는 깜짝 놀라 일어나 군인이 시키는 대로 손을 번쩍 들고 도열했다. 관등성명을 대고 취조를 받던 중 사태의 전모가 드러났다. 옆방 투숙객이 철거덕거리는 구식 계산기 소리를 듣고 무장간첩이 이북으로 무전을 치는 줄 알고 경찰에 신고를 했던 것이다. 일반국민들도 87 법무사 2018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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