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정신으로 무장했던 그때 그 시절의 웃지 못할 에피 소드 중 하나다. 1972년, 공무원범죄대책 보고서 1972년 초. 법무부는 그 전해인 71년 7월 일어난 1차 사법파동의 여파로 매우 위축되어 있었다. 당시 신직수 장관은 이런 분위기를 쇄신하는 차원에서 법무부차관 과 검찰국장은 물론이고 검찰과장과 검사들까지 모두 대구, 부산 등 지방청으로 전보시켰다. 법무부는 후임 자들이 도착하기까지 며칠 동안의 공백기를 맞았다. 그 무렵 토요일 오후로 기억된다. 장관실의 비서관이 박 대통령의 친필 메모지를 가지고 왔다. 메모에는 “월 요일 아침까지 해방 후 지금까지의 전체 범죄 추세와 공무원범죄 추세를 비교분석하고, 향후 공무원범죄 대 책을 세워 보고하라.”고 쓰여 있었다. 필자는 즉시 직원들과 법무부 창고를 뒤져 1945~1959 년의 통계자료를 찾아냈다. 저녁 무렵이 되어 1945년 이 후의 범죄통계 분석을 모두 마치고, 서울지검의 공무원 범죄대책을 그대로 옮겨 보고서를 완성했다. 하지만 뭔가 찜찜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채 퇴근 후 잠 자리에 들었다가 새벽 3시경, 심한 가위에 눌렸다 잠에서 깨어났는데, 순간 핑~ 하고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서울지검의 대책은 모든 공무원범죄를 형사법의 잣 대로 재어서 처벌하자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하다 보면 주요 국가기관의 체면이 크게 손상되는 문제가 있 다. 그보다는 사안별로 해당 중앙기관에 넘겨 면직 등 의 행정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필자는 보고서를 수정했다. 그 리고 부산지검 이영욱 과장의 검토를 거쳐 차트를 작성 했다. 하지만 월요일이 되자 검찰국장이 노발대발했다. 지검의 과장이 아닌 법무부의 필자가 작성했다는 보고 를 받고는 내용도 보지 않은 채 화를 낸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장관실에서 바로 대통령께 보고해야 하니 급히 보고서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결 국 보고서는 수정 없이 그대로 장관에게 올라갔고, 장 관은 그 보고서를 가지고 청와대로 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검찰국장실에서 부른다는 연락이 왔다. 긴장된 마음으로 검찰국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국장이 희색만면한 얼굴로 필자를 맞았다. 보 고서를 본 박 대통령이 무릎을 세 번이나 치면서 “그렇 지, 국가기관 체면이 있는데 공무원범죄 모두를 형사 처 벌하는 것보다는 사안에 따라 행정처벌로 다스리는 것 도 좋지”라고 하며 칭찬을 했다는 것이다. 결국 보고서 사건은 필자의 제안대로 사안에 따라 형사처벌과 행정조치로 나누어 처리하게 되었다. 이 일 로 법무부장관은 금일봉을 받았고, 필자도 대통령표창 과 해외출장 명령을 받았다. 당시 사무관이 해외출장 기회를 얻는 것은 아주 드문 경우였지만, 업무사정상 출국을 하지는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쉬운 일이었지 만, 필자는 이 사건을 법무부에 근무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 중 하나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검사, 1980년에야 배출 검찰 초기에는 업무의 특성상 여성 검사나 여성 직원이 매우 드물었다. 검찰은 구한말부터 해방될 때까지 법원 (예전 재판소)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다 1948.8.15. 대 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검찰조직의 최초 기본법인 「검 찰청법(법률 제81호)」이 민선 입법기관에 의해 제정, 공 포되면서 현재의 검찰제도가 시작되었다. 당시 「검찰청법」 제16조, 17조에서는 대법관 자격이 있는 판사를 검사장으로 임명하는 규정이 있었을 정도 로 검사들은 법관보다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 88 법조, 그땐 그랬지 문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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