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법무사 7월호

시대 따라 소속이 변했던 보은등기소 1973년 필자의 첫 근무지는 우리나라의 명산인 속리 산을 끼고 있는 충북 보은등기소였다. 그 시절에는 으레 그랬듯이 필자도 등기소의 초임 공무원으로서 닥나무 껍질로 만든 하얀 미농지 사이에 먹지를 끼우고 등기부 등본을 필사해 교부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요즘의 젊은 초임들이 들으면 미농지 필사라니 그 원 시적인 사무에 실소(失笑)할 일이겠으나 불과 45년 전 인 당시만 해도 복사기도 컴퓨터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던 보은의 등기소는 1915년 공 주지방법원 보은출장소로 개소되어 1938년에는 대전 지방법원 보은출장소로, 1945년 11월 19일에는 청주지 방법원 보은출장소로 변경되었다. 1947년 1월 1일에는 청주지방심리원 보은출장소로 개명되었다가 1948년 6월 1일, 다시 청주지방법원 보 은등기소로 바뀌는 등 시대에 따라 소속과 명칭이 4번 이나 바뀌었다. 필자가 근무했던 1973년 9월 1일에는 보은등기소 와 함께 보은순회심판소가 병설되었는데, 이 심판소도 1995년 9월 1일자로 보은군 법원으로 변경되었다. 필자가 첫 근무지로 일하던 1973년은 제3차 경제개 발계획의 일환으로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고 본격적인 산업화, 도시화가 진행된 시기였지만, 시골의 작은 등기 소는 크게 바쁜 일이 없었다. 당시 보은등기소의 규모 가 얼마나 작았냐 하면, 직원이래야 소장과 필자, 타자 수와 청부, 이렇게 딱 4명뿐이었고, 등기소 병설 순회심 판소에도 법정정리 1명이 있는 정도였다. 무거운 부책등기부 옮기다 땀범벅 된 기억 보은등기소를 시작으로 필자는 여러 등기소에서 근 무했는데, 1990년경, 동대문 등기소에서 근무하던 때 가 기억난다. 당시에는 부책식 등기부를 사용할 때라 하루에도 수십 권의 등기부 책을 품에 안고 2층 창고를 오르내려야 했다. 지금은 등기부가 전산화되어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 드만 누르면 되지만, 당시는 그 무거운 부책부 등기부를 들고 낑낑대며 창고를 오르내리는 일이란 거의 공사판 중노동에 견줄 만큼 고된 일이었다. 무더운 여름, 땀으로 뒤범벅된 몸을 이끌고 수시로 물을 들이켜 가면서 부책부를 나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그것을 당연한 일로 여겨 힘들었지 만 힘든 줄 모르고 지냈다. 또, 수없이 손을 타 너덜너덜해진 등기부의 속이 자 칫 헤어질세라 조심조심 관리하던 일, 복잡 난해한 공 유지분을 대조하며 일일이 육필로 등기사항을 기재하 던 일도 기억난다. 그 시절 특히 잊지 못할 일들은 등기소에서 만났던 다양한 민원인들의 모습이다. 1997년경, 과천등기소장 으로 일하던 때의 일인데, 어느 날, 한 민원인이 창구에 서 고성을 지르며 직원과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황급히 달려 나가 민원인의 이야기 를 들어보니, 자신의 땅은 본래 ‘논’인데 왜 등기부에는 “답(畓)”으로 기재되어 있냐며 당장 고쳐 놓으라는 것이 었다. 논과 밭의 한자인 ‘답(畓)과 전(田)’을 착각한 것인 데, 공무원의 오류 기재로 하루아침에 자신의 논이 밭 으로 되었다며 흥분하는 민원인을 진정시키느라 진땀 을 흘렸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민원인들은 순박하고 정이 있 었다. 일부러 공무원을 괴롭히려는 악성 민원인은 찾아 보기 어려웠다. 세월이 흘러 등기소의 사무기기나 인적· 물적 자원이 매우 발전하고 여러 제도도 말할 수 없이 편리해졌지만,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인정만큼은 그 시 절이 더 좋지 않았나 싶다. 85 법무사 2018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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