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금이 저렸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현장검증 1995년. 당시 필자는 서울고등법원 형사2부에서 참 여사무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95년 우리나라에서는 끔찍한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바로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이다. 5층 건물의 백화점 건물이 순식간에 주저앉은 이 사고는 대 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최악의 참사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언론보도에 의하면 사망한 사람만 501명이고, 실종자가 6명, 부상자가 937명이나 발생했다. 백화점 전체가 주저앉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20여 초. 붕괴의 원인은 백화점 측에서 1층 매장의 면적을 늘리기 위해 무리하게 다수의 중간기둥들을 제거한 때문이었다. 당시 삼풍백화점은 서울중앙법원청사 동문 맞은편 에 있었기 때문에 백화점을 찾았던 법원 직원이나 법조 인들 중에 피해자가 많이 발생했다. 필자가 아는 모 변호사도 당일 사고로 두 딸을 잃었 고, 한 부장판사는 붕괴 순간 마침 입구를 빠져나오고 있어서 작은 찰과상만 입고 기적처럼 살아남기도 했다 (이분은 후일 대법관이 되었다). 특히 붕괴시간이 퇴근 무렵이라 저녁 찬거리 등을 사기 위해 백화점을 찾았던 법원·검찰청 여직원들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 참사 이후 삼풍백화점의 모기업인 삼풍건설산업의 회 장과 상품백화점 사장, 뇌물을 받고 무리한 설계변경을 승 인한 서초구청장 등 25명이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필 자는 이 재판의 항소심에 입회 사무관으로 활동했다. 국민적 이목이 쏠린 사건이라 항소심 재판부에는 늘 긴 장이 감돌았는데, 당시 수사기록과 재판기록만 해도 캐비 닛 하나를 차지할 정도로 대단한 재판이었다. 그러다 보 니 재판 종료 시까지 법관들은 물론이고, 입회 사무관들 도 심신이 괴로울 정도로 과다한 업무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정작 필자를 괴롭힌 것은 과다한 업무가 아니 라 완전히 붕괴되지 않은 채 흉물스럽게 남아 있는 백화 점의 잔해를 헤치고 현장검증을 해야 하는 일이었다. 건물의 내부는 이미 폐허처럼 변해 먼지만 가득했고, 불빛 하나 없는 어둠침침한 공간을 손전등을 비춰가며 실 시해야 하는 현장검증은 그야말로 오금을 얼어붙게 했다. 501명의 사람이 아무런 잘못도 없이 갑작스럽게 죽음 을 맞이한 공간. 사고의 피해자들이 너무도 원통하고 억 울해 저승으로 가지 못한 채 자신이 파묻힌 자리에서 원 혼이 되어 나를 살려 달라고 외치며 손을 뻗는 것만 같아 머리가 쭈뼛 서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두려움 속에서 어떻게 현장검증을 했는지 모르게 간 신히 현장검증을 마치고 나오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도 모르게 머리끝을 만지며 현장을 빠져나오던 기억 이 난다. 지금도 생각하면 당시의 현장이 생생히 떠올라 모골이 송연해진다. 지난한 재판 끝에 항소심 재판부는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삼풍건설산업 회장에게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징역 7년 6월, 삼풍백화점 사장에게 징역 7년, 서초구 청장에게 징역 10월을 선고했다. 순환보직제도에서 배운 ‘새옹지마’의 지혜 법원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필자가 터득한 나름의 세상 살아가는 지혜랄까, 일종의 철학이 하나 있다. 그 것은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것. 직장이란 보 호막의 울타리에 있을 때나, 사회의 허허벌판에 내쳐졌 을 때나 마찬가지로 인생사에는 행과 불행이 교차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오늘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실망 할 필요도 없고, 만족스럽다고 호들갑 떨 일도 아니다. 정도를 지키며 걷다 보면 모두가 교차하며 공평하게 지 나가기 때문이다. 필자는 현직에 있을 때 인사권자인 상사에게 단 한 번도 좋은 보직, 이른바 ‘꽃보직’을 청한 적이 없었다. 사 86 법조, 그땐 그랬지 문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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