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법무사 9월호

로써 과학과 신앙, 교회와 일반 사회 간의 가치 있는 조화를 이루기를 바란다”고 밝히며 교 회의 잘못을 인정했다. 갈릴레이가 이단으로 선고 받은 지 346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우리는 여러 역사적 사건들을 접하며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해 인간의 인식이 갖는 한계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지금 옳다고 믿고 있는 것은 과연 불변의 진리인가, 그것은 의심하거나 회의할 여지가 없는 것인가.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절대적이고 영원한 답은 없을 수 있다. 독선과 불관용이 판치던 시대 한복판에서, 회의주의를 받아 들여 지식의 한계를 인식하고 독선과 독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 한 질문들이 있었다. 데카르트는 전적으로 확실한 것이 아니면 어떤 의견에 동의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며, 확실한 인식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 ‘회의’를 말했다. 그는 『방법서설』에서 “나는 내 정신이 보통 사람의 정신보다 모든 점에서 더 완전하다 고 주제넘게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자기가 믿는 것을 확실하다고 여기지 말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회의해야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몽테뉴는 『에세』에서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끊임없는 자기 의심과 회의를 통해 더 바른 인식을 추구해야 함을 말했다. 16세기 극단의 대결시대에 던 져진 몽테뉴의 이 같은 성찰 정신은 이후 톨레랑스(tolerance)의 준거가 된다. 나와 다른 생각을 포용하고 화해할 수 있는 정신 말이다. 이들보다 더 일찍, 아테네 시민법정에 섰던 소크라테스는 조용히 살라는 요구를 거부 하며 “‘내가 검토 없이 사는 삶은 인간에게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하면, 여러분은 이런 말을 하는 나를 훨씬 더 못 미더워할 겁니다”라고 했다.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분투했던 수많은 철학자들은 이처럼 ‘성찰’을 인간 이 지켜야 할 핵심적 덕목으로 제시했다. 끊임없이 자신을 회의하고 성찰하는 인간이라야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타인들과 함께하는 삶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람이 성찰 능력을 갖지 못하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다. 자기의 생각과 다른 것에 대해서는 문을 닫아걸고 그냥 안으로 들어가 버린 다. 자기의 신념이나 생각만을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신봉하고, 그에 대한 어떤 이견도 거부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자기와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적대시하는 것은 우리 네가 믿고 있는 것을 의심하라 문화의 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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