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법무사 9월호

74년, 전무후무한금융사기꾼박영복사건 필자가수사관으로참여하며겪은가장기억에남는 사건은 1974년 ‘박영복금융사기사건’이다. 박영복은사기사건에관한한전무후무한인물이다. 평생을 걸쳐 이어진 사기행각은 74년 처음 적발되었는 데, 당시 박영복은 금록통상 등 18개의 회사를 설립하 고부실기업들을인수한후등기소장등과공모해위조 한등기부등본과수출신용장을시중은행에제출, 대출 받는수법으로 74억원을편취한혐의로기소되었다. 당시 박영복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는데, 70년대에 74억 원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그만큼 박은 대범하고 지능적인 사기꾼이었다. 그것은 이후그가벌인사기행각을통해서도증명된다. 1978년복역중이던박영복은간염과당뇨병을이유 로 형집행 정지를 받아 석방된다. 출소 후 그는 이름을 ‘이영국’으로 바꾸고, 그 이름으로 ‘아풍산업(주)’ 등의 회장 행세를 하면서 여러 개의 유령회사를 세우며 또 다시사기사건을벌이기시작한다. 1차사건때와비슷한수법으로신용보증기금에서 21 차례나 신용보증서를 발급받아 8개 금융기관에서 거 액의 돈을 대출 받았다. 다행히 곧 꼬리가 밟혀 구속되 었지만, 12년 후인 2012년형집행을 마치고 출소해이 번에는무려 1천억원대의사기를쳤다. 물론이때도적 발돼구속됐다. 필자는 1978년, 박영복의 2차 사기사건 수사 때 서 울지검수사과소속으로참여했다. 그런데아무리대단 한 사기꾼이라 해도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대책 없 이속임수에넘어간것인지처음에는도무지이해가되 지 않았다. 하지만, 수사를 할수록 그 이유를 알 수 있 었다. 1978년 박영복이 서울대병원으로 주거제한을 받는 치료 목적의 형 집행정지를 받고 석방되었을 때, 박은 단지 가벼운 당뇨증세만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서울 대병원차트에는박영복이매일치료를한것으로기록 되어있었다. 또, 박이 주기적으로 주거제한을 이행하고 있는지 관찰보고를 해야 하는 동대문경찰서 수사과와 명륜파 출소 경찰들은 하나같이 박영복이 “링겔을 꽂고 있다” 는 등의 허위보고를 일삼았다. 심지어 명륜파출소의 당시 소장은 유일한 재산이었던 자신의 정릉 소재 2층 집을 박에게 대출 담보물로 제공하기까지 했다. 결국 그집을날리게되자소장은자살하고말았다. 그렇게범죄수사일선에있던경찰관들이박의손아 귀에서 놀아났다. 그러니 일반 피해자들이야 말해 무 엇 하랴. 결국 경찰, 공무원들의 일탈과 부도덕, 그리고 사람의 욕심과 욕망이 한데 뒤섞이며 발생한 희대의 사기사건이었다. 지금도그때를떠올리면명륜파출소장집을찾은우 리수사관들을퀭한눈으로바라보던미망인의얼굴과 천진난만하게집안을뛰어다니던아이들의모습이생 각나가슴한쪽이찡해온다. 82년장영자사건, 왜곡보도고충도 필자가 수사관으로 경험했던 또 하나의 큰 사건은 1982년 ‘장영자·이철희 사건’이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 ‘건국 후 최대 규모의 금융 사기사건’으로 불리고 있다. 장영자는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삼촌 처제였다. 그리고 이철희는 장영자의 남편으로, 중앙정보부 차장 과국회의원을역임한유력인사였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서로 공모해 자신들의 배경을 무기로대출과어음할인을통한대형금융사기를벌였 다. 사기의대상은주로자금압박에시달리는기업이었 다. 이들 기업에 접근해 그럴싸한 조건을 제시하고, 필 85 법무사 2018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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