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년, 전무후무한 금융사기꾼 박영복 사건 필자가 수사관으로 참여하며 겪은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1974년 ‘박영복 금융 사기사건’이다. 박영복은 사기사건에 관한 한 전무후무한 인물이다. 평생을 걸쳐 이어진 사기행각은 74년 처음 적발되었는 데, 당시 박영복은 금록통상 등 18개의 회사를 설립하 고 부실기업들을 인수한 후 등기소장 등과 공모해 위조 한 등기부등본과 수출신용장을 시중은행에 제출, 대출 받는 수법으로 74억 원을 편취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당시 박영복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는데, 70년대에 74억 원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그만큼 박은 대범하고 지능적인 사기꾼이었다. 그것은 이후 그가 벌인 사기행각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1978년 복역 중이던 박영복은 간염과 당뇨병을 이유 로 형집행 정지를 받아 석방된다. 출소 후 그는 이름을 ‘이영국’으로 바꾸고, 그 이름으로 ‘아풍산업(주)’ 등의 회장 행세를 하면서 여러 개의 유령회사를 세우며 또 다시 사기사건을 벌이기 시작한다. 1차사건 때와 비슷한 수법으로 신용보증기금에서 21 차례나 신용보증서를 발급받아 8개 금융기관에서 거 액의 돈을 대출 받았다. 다행히 곧 꼬리가 밟혀 구속되 었지만, 12년 후인 2012년 형 집행을 마치고 출소해 이 번에는 무려 1천억 원대의 사기를 쳤다. 물론 이때도 적 발돼 구속됐다. 필자는 1978년, 박영복의 2차 사기사건 수사 때 서 울지검 수사과 소속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아무리 대단 한 사기꾼이라 해도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대책 없 이 속임수에 넘어간 것인지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 지 않았다. 하지만, 수사를 할수록 그 이유를 알 수 있 었다. 1978년 박영복이 서울대병원으로 주거제한을 받는 치료 목적의 형 집행정지를 받고 석방되었을 때, 박은 단지 가벼운 당뇨증세만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서울 대병원 차트에는 박영복이 매일 치료를 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었다. 또, 박이 주기적으로 주거제한을 이행하고 있는지 관찰보고를 해야 하는 동대문경찰서 수사과와 명륜파 출소 경찰들은 하나같이 박영복이 “링겔을 꽂고 있다” 는 등의 허위보고를 일삼았다. 심지어 명륜파출소의 당시 소장은 유일한 재산이었던 자신의 정릉 소재 2층 집을 박에게 대출 담보물로 제공하기까지 했다. 결국 그 집을 날리게 되자 소장은 자살하고 말았다. 그렇게 범죄수사 일선에 있던 경찰관들이 박의 손아 귀에서 놀아났다. 그러니 일반 피해자들이야 말해 무 엇 하랴. 결국 경찰, 공무원들의 일탈과 부도덕, 그리고 사람의 욕심과 욕망이 한데 뒤섞이며 발생한 희대의 사기사건이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명륜파출소장 집을 찾은 우 리 수사관들을 퀭한 눈으로 바라보던 미망인의 얼굴과 천진난만하게 집 안을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모습이 생 각나 가슴 한쪽이 찡해 온다. 82년 장영자 사건, 왜곡 보도 고충도 필자가 수사관으로 경험했던 또 하나의 큰 사건은 1982년 ‘장영자·이철희 사건’이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 ‘건국 후 최대 규모의 금융 사기사건’으로 불리고 있다. 장영자는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삼촌 처제였다. 그리고 이철희는 장영자의 남편으로, 중앙정보부 차장 과 국회의원을 역임한 유력인사였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서로 공모해 자신들의 배경을 무기로 대출과 어음할인을 통한 대형 금융사기를 벌였 다. 사기의 대상은 주로 자금압박에 시달리는 기업이었 다. 이들 기업에 접근해 그럴싸한 조건을 제시하고, 필 85 법무사 2018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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