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상당액을 차용해주면서 그 담보로 2~9배에 달하 는 약속어음을 받은 후 이 어음을 할인해 또 다른 기업 에 같은 수법으로 돈을 빌려주고 어음을 받아 할인하 는 등의 수법으로 7111억 원에 달하는 어음과 6404억 원이라는 거액의 자금을 조성했다. 당시 이 사건으로 공영토건과 일신제강 등이 도산 했다. 은행장 2명과 기업체 사장 등 간부 30여 명도 구 속되었다. 규모가 이러하다 보니 수사관이었던 필자도 장장 보름을 귀가도 못 한 채 수사에 매달렸다. 당시 장영자·이철희 부부 사기사건은 사회적으로도 초대형 이슈였다. 그만큼 언론의 관심도 지대해 본의 아니게 필자가 고초를 겪은 일이 있었다. 당시 이 사건 의 한 줄기에는 일신제강(주) 주창균 회장과 상업은행 공덕종 행장 사이에 일어난 거액의 부정대출사건이 있 었다. 두 사람은 서로 존경하며, 30년간 우정을 이어온 사 이였다. 그런데 일신제강이 장영자에게 걸려들어 어려 움에 처하자 공 행장은 주 회장의 거액 대출 요청을 거 절치 못하고 대출을 해줬다. 그리고 주회장이 가져온 사례금(당시 거액대출 사례금보다 매우 적은 액수)을 거절했으나 주 회장이 억지로 사무실에 팽개치다시피 놔두고 가면서 결과적으로 대가성 뇌물을 받았다. 그러나 비록 사회적으로 큰 비리를 저지른 두 사람 이었지만, 수사를 하면서 바라본 두 사람은 점잖고 품 성도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필자도 최대한 인간 적으로 대하며 조사를 했다. 두 사람도 “어차피 구속은 될 테니 출소 후 다시 만나자”는 말까지 할 정도로 필 자를 신뢰했다. 결국 그 덕분에 자백도 쉽게 받아냈다. 수사를 모두 마치고, 필자는 두 사람이 자백한 자술 서를 상관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다음 날 00일보에 기 사가 났다. 담당 수사관(필자)에 따르면 부정대출 사 실을 부인하던 두 사람이 엄한 추궁 끝에 상대방을 욕 하며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는 치사한 행태를 보이다가 결국 범죄가 탄로 났다는 내용이었다. 소설도 이런 소설이 없었다. 기가 막히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평소에도 언론의 그런 행태로 인해 수사 에 애로를 겪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이번의 경우는 해도 해도 너무한 것이었다. 하지만 기사는 이미 보도 되었고, 참는 것 외 별다른 수도 없었다. 이 보도로 인 해 필자는 비열한 위선자가 되었고, 그 두 사람의 30 년 우정도 물거품이 되었다. 일본인 토지 사기사건 피해자의 눈물과 보은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인 소유였던 토지는 우리 정 부 수립 후 「귀속재산처리법」에 의해 모두 국가 소유로 귀속되었다. 그러나 등기부상 소유자가 “田中日光”와 같이 4자로 되어 있는 경우, 이 토지가 일본인 소유인 지 아니면 창씨 개명한 우리나라 사람 소유인지 헷갈 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 토지가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 소유 토지 라면, 그것은 그야말로 무주공산과도 같아서 토지 사 기단들에게 제1순위의 먹잇감이 되었다. 1981년, 당시 서울 남부지청 수사과에서 계장으로 근무하던 필자는 한동안 이런 토지사기단을 적발하고 수사하는 일에 매 달려 있었다. 수사 대상은 강화, 김포, 의왕, 안산, 당진 등을 무대로 하는 사기단들이었다. 당시 수사한 사건 중 잊히지 않는 토지사기사건 하 나가 있다. 안성군(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에는 임야 등으로 20여 만 제곱미터 정도 되는 큰 토지가 있었는 데, 이 땅이 바로 일본인의 소유였다. 당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부근 마을 이장이 이 토지를 탐내 사기사건을 공모한다. 구청에서 토지대장 과 지적도 등을 담당하는 직원을 꾀어내고, 여기에 몇 86 법조, 그땐 그랬지 문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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