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간짜리 최후진술, 1개의 고무도장으로 타자기가 보급되기 전, 재판조서는 모두 펜으로 직접 써서 작성해야 했다. 모든 공적 서류들이 그렇지만, 검 찰청의 서류들도 법률에 정해진 양식에 따라 관행적으 로 사용되는 문구들이 많았다. 서류를 작성할 때마다 이런 관행 문구들을 써넣는 일은 생각보다 고역이었다. 법원주사 등에게는 조서를 쓰는 업무가 바로 그런 일 이었다. 그러다 보니 생겨난 게 바로 ‘고무도장’이다. 민 사조서 작성 시 자주 사용되는 ‘소장 진술’, ‘답변서 진 술’, ‘증거관계별지와 같음(서증·증인 등)’, ‘소송관계표 명’, ‘변론종결 등’의 문구들을 고무도장에 새겨서 수십 개의 고무도장을 날인해 조서를 완성하는 것이다. 나중에는 요령이 늘어서 ‘의제자백조서’ 같은 것은 고무도장만으로 충분히 완성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고무도장은 이러한 편리함으로 누구든 입회주사로 발령을 받으면 맨 먼저 고무도장부터 챙겼고, 전근을 갈 때도 반드시 챙겨가는 필수품이 되었다. 그러나 고무도장을 이용해 조서를 간단히 작성하는 건 편리했지만, 형사조서에 활용되는 것에 대한 이의 제 기로 난감할 때도 있었다. 조서 작성에서 원칙은, 민사조서의 경우는 변론의 요 지를 적는 것이나 형사조서의 경우는 진술을 가감 없이 그대로 기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법정에 녹음기능도 속 기사도 없었던 시대에 입회 주사가 피고인이나 변호인 이 빠르게 쏟아내는 최후진술을 그대로 받아 적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1시간 이상 최후진술을 해도 조서는 간 단히 핵심만 기록되었고, 그중 관행적인 문구들은 고무 도장으로 대체되었다. 예를 들어 최후진술을 서면으로 제출하지 않았다면, 변호인 진술은 ‘피고인에게 유리한 진술’이라는 고무도 장, 피고인 진술은 ‘억울하다고 진술’, ‘관대한 처분을 바 란다고 진술’, ‘공정한 재판을 바란다고 진술’이라는 고 무도장을 사용해 약식으로 기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법정에 속기사가 배치되고, 녹음 기능이 설치되면서 고무도장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 최후진술의 내용은 법률적인 평가와는 크게 관련이 없었으나 긴급조치 9호사건 등 시국사건의 변호인이 나 피고인이 최후진술 전문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 기 재 형식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속기사가 배치되고 녹음 시설이 확충되는 등 현재와 같은 법정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숨만 잘못 쉬어도 잡아간다는 긴급조치 9호사건 1972년 10월 17일, 「유신헌법」이 공포되며 여러 가지 긴급조치가 발효되었다. 그중 가장 강력한 긴급조치는 1975년 5월 13일 발동된 긴급조치 9호였다. 이는 긴급조치의 결정판으로 ▵「유신헌법」에 반대하 거나 이를 보도하는 행위를 일절 금지하고,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으며, ▵이 조치에 의한 주무장 관의 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1970년도 말, 법원 형사재판의 주 업무 는 긴급조치 9호 사건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당시 대표 적인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인 ‘남민전 사건’ 등 시국 사건들은 그 피의자만도 수십 명씩 되었기 때문에 사 건 기록이 봉고차에 가득 실릴 정도로 많아서 한 재판 부가 한 사건씩만 맡아도 재판에 수개월이 소요될 정 도였다. 이러한 무소불위의 긴급조치 9호다 보니 발효되었던 4년 6개월 동안 1,000명 이상의 전과자가 양산되면서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였다. 이 시대를 살아본 사람이라면, 언론의 자유뿐 아니 라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살지 못한다는 것이 얼 85 법무사 201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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