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법무사 7월호

달려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낚시용 아이스박스를 붙잡고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승객도 있었다. 어떤 승 객은 파카잠바를 입은 덕에 물속에 가라앉지 않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래층 선실에 있던 승객 대부 분은 빠져나오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순식간에 배가 침몰하면서 서해훼리호에서는 구조 신호를 보내지 못했다. 그나마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들이 사고를 목격하고 조난사실을 알렸다. 어선 들은 구조대가 오기 전 필사적으로 생존자를 구조해 40여 명의 목숨을 살렸다. 침몰한지약 1시간후, 구조헬기와군경함정을동 원한 수색작업이 시작됐다. 그러나 강풍과 심한 파도 속에서구조작업은난항을겪었다. 사고당일오후 10 시까지 70명의 생존자가 구조되었고, 시신 51구가 인 양되었다. 같은 배에 타고 한날한시에 출발했지만 승 객들은 배 안의 상황에 따라 생사가 갈리고 말았다. 10월 15일에는 선장과 기관장, 갑판장의 시신이 침 몰한 선박의 통신실에서 발견됐다. 11월 2일, 마지막 실종자의 시신이 인양되었고, 구조작업이 완료됐다. 사망자는 모두 292명. 희생자들은 구명조끼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아 더 큰 피해를 보았다. 사고발생뒤정부당국은정확한승선인원과명단을 파악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희생자들 중에는 위도면 주민이 60여 명으로 가 장 많았다. 단합대회 차 위도를 찾았던 육군본부 기 획관리참모부 전산처 운영체계과 영관급 장교 7명은 전원 사망했다. 낚시관광을 왔던 대전시 서구 괴정동 한국통신연 수원의 교수요원 8명 중 6명이 참변을 당했다. 경제 기획원 직원 13명 중 10명도 영영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간부수련회를 떠났던 KBS노동조합 전북지구 집행 간부 9명 중 4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주시 완산구 서 서학동 동사무소의 경우 전체 직원 20명 중 절반에 가까운 9명이 사망했다. 이 밖에 부부 또는 가족단위 로 서울에서 원정 낚시를 갔던 사람들의 희생이 많 았다. 사고 후 가족을 잃은 위도 주민 중 상당수가 “바다 가 싫다”며 삶의 터전이었던 섬을 떠났다. 당국은 사 고 7일만인 10월 17일, 선체를수면위로인양했다. 그 러나 인양선 로프가 끊어지면서 12시간 만에 다시 침 몰했고, 열흘 후인 10월 27일 인양이 최종 완료됐다. 과적과정원초과등예상된인재사고 정부는 서해훼리호 침몰사고 원인규명을 위한 ‘중 앙사고대책위 합동조사반(반장 이기표 서울공대 교 수)’을 가동했다. 사고 초기 침몰에 대한 다양한 의 견이 제시됐다. 합동조사반은 배의 구조적 문제, 당 시 기상 상황, 인원초과와 과적 등을 놓고 다각도로 분석했다. 그리고 조사결과 발표를 통해 “서해훼리호 사고는 과적과 정원초과에 따른 선박의 복원력 상실과 사고 순간의 파도 각도, 선박의 배수불량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어났다”고 결론지었다. 합동조사반은 사고 당시 배에는 승선인원 외 멸치 액젓 9t, 자갈 7.3t 등 16.3t의물품이적재되어있었는 데, 이것은최대재화적재기준보다 6.5t을더실은것 이라고 밝혔다. 이 상태에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해 보니 파도 방향이 30도에 불과한데도 배가 전복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해훼리호는 정원초과와 과적으로 인해 배의 무 게중심이 올라가 복원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에서 추 파(배의 뒤편에서 오는 파도)를 맞았다. 이때 마침 큰 각도로 우회전하다 순식간에 전복된 것이었다. 합동조사반은 또 다른 침몰 이유로 해운항만청이 만재흘수선(화물과승객을최대한실었을때물에잠 31 법무사 2019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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