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법무사 4월호

에 암이 생겨 세상을 떠났다. 형님은 내가 서울에 올라와 주경야독 할 때 손수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주 셨던 분이다. 우리는 함께 죽을 고비도 넘 겼다. 내가 세탁소를 경영할 때 연탄가스 중독으로 형님과 나, 사촌동생과 기사까 지 4명이 생명을 잃을 뻔했다. 다행히 형 님이 먼저 일어나 문을 열다가 쓰러져 기 절했는데, 내가 문을 열어 다른 사람들을 모두 깨워 살아났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했지만 형님이 가시고 나니 본의 아니게 내가 집안의 어른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 말씀 대로 선조들을 한곳으로 모셔 납골당을 만들고 싶었으나 다섯 가족 중 두 가족이 이미 다른 곳에 묘를 썼기 때문에 세 집 밖에 없는 상태에서 납골당은 의미가 없 어 보류했다. 언젠가는 한곳으로 집결하 여 조상님들이 편히 쉬시도록 해 드려야 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그러나 수십 년 세월이 흐르고 그분들 모두 저세상으로 가셨어도 좀처럼 잊혀 지지 않는 일이 있다. 내가 돈을 벌어 혼 자 먹고 사는 것도 아니고, 학교 다니겠 다고 고생하는데 그렇게 야박할 수가 있 었다니. ‘내가 성공해야지, 기필코 성공해야지. 성공해서 복수할 거야.’ 이를 갈며 이런 생각으로 밤잠을 이루 지 못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가세가 기 울어끼니걱정을안할수없는보릿고개 를맞으면서도어린학생이었던나는학교를빠질수없어수업료 안 낸다고 학교에서 쫓아내도 이를 갈고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돈이 많고 재력이 제일 탄탄했던 작은아버지는 고집이 세고 자기 자식밖에 몰랐다. 자기 부모님 제사상에 올릴 쌀이 없 는 상황인데도, 제삿날이 되어서야 겨우 쌀 몇 되 사서 보내곤 했 다. 학교에서 수업료 때문에 쫓겨나 “작은아버지, 수업료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했으나 ‘네 아버지한테 달래라’며 잘라 버렸다. 나는 친척이 어려울 때는 꼭 도와줘야지 다짐했다. 공직 생활 을 하면서도 형님이 병원에 입원하면 병원비를 보태고, 전세금이 없다고 해 몇천만 원도 보태주었다. 조카가 사고를 당했다고 해 서 마이너스 통장을 헐어 두말 없이 보내기도 했고, 사촌형님이 경매로 땅과 건물을 날리게 생겼다고 해서 원금과 이자까지 막 아준 일도 있었다. 핏줄이 뭔지 어려울 때 남보다는 나아야 되지 않겠는가. 내가 제약회사 다닐 때 부도로 회사를 나오게 되어 또 생계가 막막했 다. 그렇다고 다시 전 회사로 찾아갈 염치도 없고, 당장 거처가 없 으니 할 수 없이 작은아버지 댁에서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그당시는작은아버지도 4남매어린아이들과단칸방에서 고생하시던 터라 염치가 없었지만, 작은 방 하나가 있어 사정 말 씀을 드리고 우선 몇 달만 기거를 부탁했다. 그런데며칠묵고밖에나갔다집에와보니책상과책, 이불등 내 소지품을 모두 밖으로 내놓은 것이 보였다. 아~ 올 것이 왔구 나, 친척이 더 무섭구나, 눈물을 감추고 봇짐을 싸서 나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아는 거래처였던 세탁소에 우선 짐을 맡기고 나와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무슨 친척입니까. 지나가는 거지한테도 따뜻한 말 한 마디는 할 수 있는데, 위로는 못 할망정 쪽박을 깬단 말입니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지만, 다 소용없다. 작은아버지는모학교법인과소유권이전문제로송사를한적 이 있었는데, 정읍지원에서 1심판결이 승소되었다. 그때 학교법인 측에서 절반씩 양보하고 화해하자고 했지만 거절을 하더니 광주 고등법원에서 패소, 대법원에서 패소하면서 영영 재산을 놓치고 말았다. 83 법무사 202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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