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법무사 1월호

로 그렸다. 흰색의 붓 터치가 소의 등줄기를 타고 산맥처 럼 힘차게 내리뻗은 한반도의 모습이다. 예로부터 소는 인류와 함께한 충직한 동물이었다. 농경사회에 중요한 동 반자였으며, 물건을싣고옮기는수단이기도했다. 또, 소는 자식의 대학 학자금 밑천으로 농부들에 게는 큰 재산이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할 만큼 친 숙한 소는 우리 모두의 가족이었다. 화가들에게는 그림 의 소재로 채택되어 민족혼과 농민의 생활상을 대변해 주기도 했다. 소를많이그린화가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의 유복한 집안에 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오 산학교에서 미술교사 임용련(任用璉, 1902~?)을 만난다. 그의 권유로 미술에 입문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1937년 일본 도쿄 문화학원 유학 중에 후배인 야 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1921~, 한국명 이남덕)를 만나 결혼한다. 평양에서 미술교사를 하며 단란한 생활을 하 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부인과 두 아들을 데리고 월남한다. 부산과 제주도 등지 에서 보낸 피란생활은 힘겨웠다. 전쟁과 그로 인한 가난 은 작품 활동도, 가족의 행복도 지켜줄 수 없었다. 마침내 이중섭은 1952년 7월경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의 처가로 보낸다. 홀로 남겨진 그는 여러 지역을 떠 돌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그림으로 남겼다. 화가의 가족이 따스한 남쪽으로 가고 있는 행복한 모습을그린 「길떠나는가족」에서그의가족을그리워하 는 애잔함을 느낄 수 있다. 해변에서 아이들과 물고기를 잡는 장면,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장면 등 대부분의 작품은 천진하고 동화적이다. 인간을 탑처럼쌓아올린형상의변형은해학적이며자유롭다. 이중섭은 해방 전부터 소를 많이 그렸다. 작품으로 는 「황소」, 「흰 소」, 「싸우는 소」 등이 있다. 그중 한민족 의 정체성과 백의민족의 상징으로 통하는 「흰 소」가 대 표적이다. 추상화가 김환기(1913~1974)는 “이중섭은 거 의 소만을 그리는데, 세기의 음향을 듣는 것 같다”고 평 하면서 1940년 한 해를 빛낸 일등 존재로 꼽았다. 민족의상징 「흰소」, 코로나시대에큰울림 「흰 소」는 박진감 넘치는 우직한 소의 모습을 보여 준다. 1954년 작품으로, 불우한 현실을 깨치고 일어나 미래를 향한 힘찬 정진의 소망을 담았다. 강한 붓 터치 로 그려진 소는 화면을 박차고 나올 것만 같다. 정면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열정이 가득하다. 어디론가 향하는 앞발과 쭉 뻗은 뒷다리에서 힘이 느껴진다. 꼿꼿이 세운 등에서 꼬리까지 균형을 이루며 전진하는 포즈다. 검은색에 거친 흰색의 굵은 선이 기운 차다. 오른쪽 아래 “중섭”이라는 사인이 있다. 그림 속의 소는 가족을 찾아 떠나는 그의 자화상 같다. 이중섭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격동기를 살다 갔다. 상처투성이의 삶은 예술로 승화되었다. 그의 작품은 전쟁과 가족과의 생이별, 가난, 고독이 뒤엉킨 삶 의 진창에서 핀 꽃이었다. 어렵기로는 코로나19로 위기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 시대와 이중섭의 시 대가 겹친다. 이중섭의 작품이 코로나 시대에 더 큰 울림을 주는 것은 힘든 시절에 좌절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 지와 노력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희망은 있 다. 택배기사의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주말에는 쉬는 안 을 놓고 머리를 맞대는 중이다. 코로나19를 잡을 백신소 식도 들린다. 어느 정치인의 말처럼 닭의 모가지를 비틀 어도 새벽은 온다. 의지와 열정만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든 일어설 수 있다. 불교에 소를 찾아가는 그림으로 「심우도」가 있다. 불성을 찾아 길을 나서는 수행과정을 시각화한 것 중 하 나다. 결국 소를 찾아 떠나는 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 라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중섭의 「흰 소」처럼 묵묵히 걷다 보면, 우리의 그늘진 일상에도 새 해의 일출이 환하게 비칠 것이다. 신축년의 흰 소는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든든한 희망을 배송한다.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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