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법무사 4월호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을 일찍 여읜 그는 가장으로 어머니를 극진하게 봉양했다. 38세 늦은 나이에 위수를 시작으로, 영남지역의 하양, 청아 현감을 지냈다. 80세에 는종3품첨지중추부사로승진하여당상관이되었다. 정선이 태어난 백악산과 인왕산 자락은 문인들의 집단 세거지로 조선시대 후기의 진경문화를 주도한 산실 이었다. 일찍이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문하에 들어간 겸재는 진경시의 대가 사천( 槎川 ) 이병연 (李秉淵, 1671~1751), 선비이자 화가인 관아재(觀我齋) 조 영석(趙榮 1686~1761)과 성리학을 배우며 ‘진경시대’를 이끈다. 이병연과는 평생 시와 그림을 주고받으며 화업 을 다졌다. 진경시대는 숙종(肅宗, 재위 1674~1720)부터 정조 에 이르는 조선시대 후기를 일컫는다. 이 시기는 조선 고 유의 색과 정신을 불어넣어 표현한 우리 문화를 꽃피운 황금기로 통한다. 한글문학이 유행하였고, 판소리가 장 안에 울려 퍼졌다. 그림은 우리의 풍토를 담은 산천을 그 렸다. 진경산수화는 화가들이 경치를 보고 마음에서 우 러난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17세기 후반,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 과 김창흡 형제가 산수기행문학을 태동시켜 18세기에 이르면 관동과 금강산 등을 그린 기유도(記遊圖) 형식이 크게 유행하는데, 그 중심에 정선이 있었다.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에는 많은 시인 묵객(墨客)들이 찾아가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렸다. 화가들은 명승지를 유람하고 그 린 그림을 모아서 그림첩을 만들었다. 미점준, 미파준기법으로봄정취물씬살려 조선시대에는 인왕산을 ‘필운산(弼雲山)’으로 부르 기도 했고, 필운대는 사직단 뒷길로 이어지는 지금의 배 화여자고등학교 본관 뒤뜰에 있는 암벽으로 된 ‘돈대’를 지칭한다. ‘돈대’는 하천 범람에 대비하여 주위보다 높고 평평하게 축대를 쌓은 대피시설이다. 조선 후기 필운대 는 최고의 봄놀이 장소였다. 「필운대상춘도」는 사직동에서 인왕산을 오르며 필 운대를 내려다본 풍광이 파노라마식으로 전개된다. 나 무에 연둣빛 물이 오르고 살랑이는 바람이 꽃구경 가자 고 선비들의 옷자락을 이끈다. 마음이 통하는 벗들이 모 여서 걷다 보니 인왕산 중턱까지 왔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둘러앉는다. 저 멀리 오른쪽에 는 뾰족한 관악산이 있다. 그 아래 이층 누각의 숭례문 이 보인다. 왼쪽에는 남산이 한양도성을 내려다본다. 필 운대 아래 서촌마을이 있고 도성 안에는 연둣빛 버들과 복사꽃이 만발하여 봄 풍경의 절경을 이룬다. 오른쪽에는 소나무 밑에 두 필의 말과 마부가 보 이고, 화면 아래 중앙에는 연분홍 복사꽃과 하늘거리는 버들이 화사하게 마을을 감싸고 있다. 산허리에는 8인의 선비가 앉거나 서 있는데, 시동이 한창 시중을 드는 중 이다. 선비들은 꽃구경을 하고 시를 읊으며 최고의 한때 를 즐기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모임을 ‘아회(雅會)’ 라고 했다. 가로로 작은 점을 찍는 미점준(米點峻)으로 표현한 남산은 도성을 품었고, 청색으로 표현한 관악산은 화면 상단에서 한양을 수호한다. 오른쪽에 위치한 산에는 소 나무와 마을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화면을 시원하게 처리하였다. 선비들이 차지한 산등성이는 마를 올올이 풀어놓은 것 같은 피마준( 披麻皴 ) 기법으로 골격을 잡 고, 미점을 찍어 계곡을 처리하였다. 표정이 풍경화처럼 맑고 밝다. 봄볕이 느껴지고 꽃 향기가 감돈다. 아지랑이 가득한 봄의 정취가 물씬하다. 이후 수십 년이 지나 1786년, 송월헌(松月軒) 임등명(林 得明, 1767~1822)은 「등고상화(登高賞華)」로 이 필운대 의 봄빛을 되살렸다. 정선의 파노라마 그림은 이제 핸드폰 카메라가 대 신한다. 사람들은 산행 중에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꺼내서 그 광경을 찍어둔다. 일반 카메라에는 특정 광경만 찍히지만 파노라마 기능은 다 시점을 하나로 아우르며 감동적인 광경으로, 우리의 감 각을 넓디넓게 확장해준다. 선비들이 자신의 상춘을 파 노라마로 남겼듯이, 우리도 상춘의 한때를 파노라마로 펼쳐보자.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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