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법무사 2월호

90 아버지는 이른 아침, 시냇물에 머리를 감고 정갈하게 세수를 하셨습니다. 무명 한복 위에 흰 두 루마기를 곱게 입으시고 형수님이 산후조리 중인 컴컴한 방으로 가셨습니다. 삼칠(三七)이 된 손주를 말없이 미소로 바라보는 노인의 눈가에 맺힌 눈물과, 검은 말총 갓이 호롱불에 빛납니다. 70세 할아버지와 20일 된 손주, 조손(祖孫)은 세상에서 처음으로 그렇게 눈을 맞추었습니다. “왜, 갓난애 만나는데 두루마기에 갓까지 쓰셨어요?” “조상이 후손을 처음 만나는데, 의관(衣冠)을 갖추어야지.” 50년 전 새 생명과의 만남에서, 아버지의 작은 갓이 하늘처럼 넓고 소중하게 보였습니다. 법원 생활 3년이 되던 42년 전 어느 날, 대선배님이 물으셨습니다. “양반들의 신분이 높을수록 갓의 넓이가 커지는데 그 이유를 아시는가?” “햇빛을 많이 가릴 수 있고 멋도 있으니까요.” 현문우답(賢問愚答)이라 고개를 숙이고 머리만 긁적거렸습니다. “갓이 넓어지면 서로 거리도 멀어지니 그만큼 큰 소리로 말해야 통하기 때문이라네.” 오래전 먼 길 떠나신 선배님의 말뜻을 그때는 잘 몰랐으나, 연륜이 쌓여가니 은밀한 귓속말보다 는 적당한 거리에서 여러 사람이 들을 수 있는 크기로 말하라는 의미로 느껴졌습니다. 접히지 않는 소재로 만든 갓은 방 안에서도 쓰는 모자인데, 쓴 채로는 벽에 기댈 수 없어 선비들 의 올곧은 자세 유지에 최적화된 가벼운 모자입니다. 갓의 넓이는 시대에 따라 변해 한때는 1m에 이 르렀다니 지금으로 치면 2m 사회적 거리두기가 저절로 된 셈입니다. 고대 벽화에도 나오는 갓은 풍속 의 변화로 이제는 사라졌습니다. 최근 「오징어 게임」을 제작한 넷플릭스의 또 다른 오리지널 한국드라마 「킹덤」 속 등장인물들이 쓴 갓이 외국인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베이와 아마존에서는 ‘한국전통모자(넷플릭스 킹 덤) 갓(gat, god)’이라며 판매를 했고, 디자이너 캐롤리나 헤레라는 뉴욕 패션쇼에서 여성 모델에게 갓 모양의 모자를 씌웠습니다. 이제 저도 아버지가 손주를 만나시던 그 나이가 되었지만, 만남의 소중함과 자세를 생각하며 마 음속에 늘 검은 말총 갓 하나 품고 삽니다.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한 소통은 언제나 풀기 어려운 숙제 입니다. 지금 나의 마음이 쓰고 있는 갓의 넓이는 얼마만큼 될까요? 권중화 법무사(서울중앙회)·본지 편집위원 LETTER 갓의넓이, 소통의크기

RkJQdWJsaXNoZXIy ODExNj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