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법무사 6월호

한국전쟁 발발 70년의 기억 이상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짧은 역사 다. 그러나 3년이 넘게 계속됐던 전쟁과 한반도 곳곳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 그리고 하루아침에 피란민이 되고 전쟁 한가운데서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사람들이 겪었던 불안과 고통의 삶을 몇 마디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해마다 6월이면 한국전쟁은 다시 기억되고 기념된 다. 그렇지만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과 기념은 잠깐의 공 식적인 행사에 그치고 있다. 70년 이상이 지난 전쟁은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됐고,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 들은 기억이 희미해지는 노인이 됐다. 한국전쟁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 특히 어린이, 청소년, 청년 등에게는 알고 있는 여러 전쟁 중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우크라이나의 전쟁 등이 오히려 더 생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한국전쟁 의 기억이 거의 사라지거나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남아 있는 건 아니다. 우리 사회는 한국전쟁을 사회의 정체성 을 형성하는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 이유 로 한국전쟁을 공식적으로 기념하고, 그 역사와 기억을 후대에 물려주기 위한 교육을 계속하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이 공식적으로 기억되고 반복적 으로 교육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한국 사회가 가 진 심각한 트라우마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념은 다르 지만 북한은 동일 민족이었기에 ‘설마…’ 했는데 공격을 받았고, 그래서 해방 후 자리도 잡지 못한 국가가 초토 화되다시피 했다.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들은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다시 공격받지 않아 야 한다는 공포 섞인 트라우마 때문에 전쟁 이후 군비 강화와 국가안보는 문제 제기를 허락지 않는 성역이 됐 다. 무엇보다 북한에 대한 증오와 경계가 사회적 신조처 럼 자리를 잡았다. 본래 같은 민족이었지만 이념으로 인해 갈라진 남 북한은 한국전쟁에서 서로에게 총을 겨누었다. 전쟁의 명분은 통일이었다. 북한은 사회주의 이념에 기반한 통 일을 원했고, 남한 역시 자본주의 이념으로의 통일을 원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이 기습적으로 남침을 했다. 한국 정부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그대로 무너졌다. 북한군은 6월 28일에 서울을 점령했고, 파죽지세로 남진을 계속했다.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9월 15일 새벽에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대다수 병력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했던 북한군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9월 28일 서울이 탈환됐고, 그 후 유엔군의 북진이 시작됐다. 유엔군은 중국 국경에까지 진군했고, 한반도에서 사회주의 정권을 제거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듯했다. 유엔군은 10월 25일, 국경 도시인 초산에서 중국군과 첫 교전을 가졌다. 중국은 11월 초에 한국전쟁에 공식적으로 참전했다. 중국의 참전으로 유엔군과 국군은 후퇴를 거듭했고, 1951년 1월에는 38선 이남까지 퇴각했다. 2월에 유엔군은 38선을 회복했고, 이후에는 북진하지 않기로 하면서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유엔군을 대표한 미국, 그리고 북한과 중국은 전쟁 종식을 위한 평화협상에 합의했고, 7월 10일 첫 휴전회담이 개성에서 열렸다. 휴전회담 중 북한에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 위한 유엔군의 공중 폭격과 휴전선 일대에서 영토를 더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교전이 계속됐다. 휴전회담 시작 2년이 더 지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됐고, 한국전쟁은 일단락됐다. 법으로 본 세상 17 세계의 평화 우리의 평화

RkJQdWJsaXNoZXIy ODExNj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