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법무사 5월호

러한 놀이문화가 참으로 천박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미국과 유럽 사람들의 고상한 여가문화를 칭송하며, 시 끄러운 노래에 맞춰 아무렇게나 몸을 흔들어대는 한국 인들의 춤판을 비웃었다. 언제쯤 우리는 품위 있게 여 가를 즐길 줄 알게 될까, 자탄에 빠지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보기 싫고 부끄러운 모습도 우리의 일부 분이다. 고속버스 춤은 분명 한국적인 문화 현상이다. 안전불감증, 천박함, 교양 없음으로 이해되어왔던 이 낯선 행위의 의미를 파헤쳐보자. 기능주의 인류학의 관점에 따르면 어떤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문화적 현상에는 그것이 수행하 는 기능이 있다. 고속버스 춤이 한국 사회에서 수행해 온 기능은 과연 무엇일까. 먹고살 만해진 1980년대, 억눌렸던 놀이문화 분출 고속버스 춤이 등장하던 1980년대는 오랫동안 놀 일이 없었던 한국인들이 오랜만에 ‘놀이’를 찾기 시 작하던 때였다. 열강의 침탈이 본격화되던 19세기 후 반부터 한국인들은 놀이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 다. 일제강점기에는 국권을 빼앗기고 노역과 공출에 시 달렸으며, 해방 후에는 곧바로 터진 전쟁으로 말 그대 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전쟁의 폐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50년대 와 뭐라도 해서 먹고살려 했던 60년대, 조금이라도 더 잘살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던 70년대를 지나는 동안 한국인들은 놀기는커녕 마음 편히 쉴 여유조차 찾기 어려운 삶을 살았다. 80년대가 되면서 비로소 즐길거리를 찾을 만한 여유가 생겼다. 일과 가족밖에 몰랐던 한국인들에게 관광은 비로소 한숨 돌릴 수 있는 일탈이었다. 예전처럼 며칠씩 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한 치의 아쉬움도 남지 않게 하얗게 불태우는 것. 이것이 고속버스 춤의 문화적 기능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 여러 문화에서 존재해 온 축제의 기능이 이것이다. 관광의 목적은 춤판? 고속버스 춤은 한국적 현상 약 30년 전의 일이다. 재수생이었던 나는 집안일 로 청주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밤차였던지라 언제 잠든 지도 모르게 깜빡 졸았던 듯싶다. 눈을 떴을 때,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옆 고속버스 안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춤판을 벌이 고 있는 게 아닌가. 그때의 일은 참으로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뇌리에 남았다. 그런데 고속버스 춤이 인상적이었던 사람이 나 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영화 「마더」의 봉준호 감독 또한 어릴 때 본 고속버스 춤의 강렬한 인상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옮겨놓았다. 저무는 햇살을 받으며 고속버스에서 정신없이 몸 을 흔드는 우리의 ‘어머니들’. 그들은 왜 100km로 달 리는 버스 안에서 무아지경의 춤판을 벌여야 했을까. 지금은 많이 사라진 모습이지만 한국인들의 놀 이문화에는 꼭 춤판이 등장한다. 다들 조금씩 살만해 졌던 80년대 들어 관광은 한국인들의 중요한 놀이문 화였다. 한동네 사람들이 단체로 버스를 대절해 곳곳 의 명승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관광의 목적은 명승고적의 답사가 아니었 다.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관광지 입구의 공터 에서 벌어지는 노래와 춤이야말로 관광의 중요한 이 유였다. 정작 관광지에 도착하면 부리나케 기념사진을 한 방씩 찍고는 버스 옆에 쳐놓은 천막으로 다시 돌아 와 춤판을 벌이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어린 마음에 그런 모습이 참 보기 싫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 가족을 비롯한 소위 교양있는 사람들은 그 ┃ 슬기로운 문화생활 한국인은 왜 71 2023. 05 vol.671

RkJQdWJsaXNoZXIy ODExNj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