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가 나를 알아줄 거라는 믿음은 엄밀히 말해 합리적이지 않은 생각이다. 오해를 양산하여 의사소통의 비효율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점차 개인화되고 파편화되는 현대사회의 인간관계에서 한국인들의 정(情)은 대단한 심리적 자원이 될 수 있다. 우리의 마음 습관과 변화하는 현실 사이에서 지혜로운 접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 문화심리학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가까운 사람들과의 대인관계에서 자신의 행위나 자신과 관련 된 사건에 대해서 상대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심적 경 험을 자기 자신의 경험으로 치환하여 ‘공경험(共經驗, co-experience)’하는 일에 민감하며 습관화되어 있다. 여기서 ‘공경험’이란 정서적 공감(empathy)과는 다른 의미로, 다른 이가 경험하는 내용을 마치 자신이 경험하는 것처럼 동시에 경험한다는 뜻이다. 즉 ‘공경험’은 다른 사람이 경험하는 인지, 정서적 내용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현재 상황에 대한 이해와 그 사람이 표현하고 있는 방식과 내용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말 그대로 상대방의 마음을 ‘말하 지 않아도 아는’ 것이다. 다른 이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동시에 경험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는 자신이 다른 이의 경험을 공경험하고 있다고 믿는 신념 의 체계가 존재한다. 이는 타인들의 경험을 자신의 입 장에서 해석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주관화(subjectify)’라 할 수 있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국인 심리 경험의 주관성이 완성된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한국인들의 의사소통은 이러한 신 념 체계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주관화’는 심리학에서 개인차를 만들어내는 원 인으로 꼽히고 있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배경과 지 식,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따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 을 경험해도 그 사건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이나 의미 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과정이지 만, 한국 문화의 어떤 점 때문에 한국인들은 주관화 과 정이 강조된 심리 경험 방식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한 국인들의 의사소통에서는 오해가 많이 발생한다.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며 억울해하는 일도 많고, 상대방 이 내 마음을 몰라준다며 서운해하는 경우도 많다. 정치인들마저 ‘오해다’가 다반사다. 국민을 심정 교류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제 생각으로 상대가 나를 이해해 줄 거라 믿는 것도 지극히 한국적 인 현상이다.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가 나를 알아줄 거라는 믿 음은 엄밀히 말해 합리적이지 않은 생각이다. 오해를 양산하여 의사소통의 비효율을 낳기도 한다. 특히나 인간관계의 질이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현대사회에 서 심정 교류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 커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초코파이 광고의 문구도 달라 졌다. 이제는 “말해야 알아요”의 시대다. ‘한국인의 정’은 심리적 자원, 현실과의 접점 찾아야 그러나 심정과 심정 교류의 의사소통 방식은 한 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산이기도 하다. 점차 개인화되 고 파편화되는 현대사회의 인간관계에서 한국인들의 이러한 마음 습관, 특히 정(情)은 대단한 심리적 자원 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나와 딱히 관계없는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 고, 내게 직접적인 이익을 주지 못하는 사안들에 참견 하고 오지랖을 부리며 마음을 나눈다. 세상이 과거와는 달라지면서 서로의 정을 의심해야 하는 순간도 있고, 서로 더 조심하고 신경 써야 할 부분도 늘어났지만, 기 왕에 가지고 있는 자산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도 있다. 모쪼록 우리의 마음 습관과 변화하는 현실 사이 에서 지혜로운 접점이 발견되기를 바라 본다. ┃ 슬기로운 문화생활 한국인은 왜 71 2023. 08 vol.674
RkJQdWJsaXNoZXIy ODExNj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