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법무사 10월호

바다 건너 노을이 불러서 억새 목덜미 황금색으로 익어가는 들판을 가르는데 들판이 몇 개의 지평선을 품고 있는 사원처럼 펼쳐진다 누런 가사 입은 벼들이 해탈 앞둔 고승들 모습이다 저 반짝거리는 고개들이 햇볕과 바람과 물을 지팡이 삼아 수천 년을 걸어와서 사리 같은 황금알을 베푸는 것이다 오랫동안 대자대비한 보리심을 가로채는 인면수심들 때문에 저 들판은 수많은 눈물을 흘렸다 제 철 만난 미꾸라지들이 흔들어대는 적막 속으로 마른 눈물 같은 실개천을 따라가는데 눈치가 보였는지 차가 멈춰 버린다 그 옛날 낫과 쇠스랑 높이 들고 밥을 구하던 길을 세월 잘 둔 덕에 나는 차로 맛집을 찾는다 이 사원은 곧 남김없이 비우고 다시 한동안 깊은 수평의 침묵으로 들어갈 것이다 멀리서 노을은 구름쇼로 유혹하는데 그 흔한 불상도 탑도 없어서 더 고적한 이 사원은 피보다 짧은 나의 생각에 길마다 갈대피리 같은 정자를 내놓는다 그대 만나러 수천 년을 걸어왔는데 예서 더 어딜 가느냐고 이곳이 바로 지상의 노을이 아니냐고 늙은 왜가리와 두루미가 선문답을 하고 외로워서 팔이 더 길어진 허수아비도 내 가슴도 노을처럼 익어가는. 성승철 ● 법무사(광주전남회) · 시인 황금사원 성승철 : 전남 여수 출생, 단국대, 순천대 대학원 졸업, 2009년 시 전문지 『유심』을 통해 등단, K-water 예술상·국무총리상·대통령 근정포장 수상 순천문인협회 회장(역임), 한국시인협회·한국문인협회 회원, 남문인협회 분과위원장, 공저시집 『바람으로 가자, 뒷발의 힘』 등 발간 77 2023. 10 vol.676 ┃ 슬기로운 문화생활 문화路 쉼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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