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일 때, 죽음의 불 안은 삶에 대한 의욕으로 전환될 수 있 을 것이다. 내가 늙어간다는 것이 의미 없는 삶을 유지하는 퇴락이 아니라, 마지막 까지 나를 원숙하게 성장시켜 가는 과 정이라 생각할 때, 남아있는 삶은 여전 히 의지와 활력이 도는 시간일 수 있다. 늙을수록 깊어지고 넓어질 수 있는 나 를 만들어가는 노력이 함께 한다면 말 이다. 영원히 산다면? 세상의 모든 것이 의미를 잃을 것 결국 죽음의 의미는 내가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통해 삶을 생각하게 된다. 언젠가는 닥칠 죽음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삶의 소 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빌헬름 슈미트는 『나이 든다는 것 과 늙어간다는 것』에서 죽음에 대한 해 석에 따라 삶의 귀중한 의미가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삶뿐만 아니라 죽음도 해석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죽음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 건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해석은 우리에게 위안을 줄 수 있 다. 그래서 죽음은 삶을 가치 있는 것으 로 만드는 경계선을 그어준다. 한정적으 로만 쓸 수 있는 것은 귀중하기 때문이 다. 그렇다. 모든 인간은 수명이 제한 되어 있다. 언제인가는 죽을 수밖에 없 다는 삶의 유한성은 우리가 살고 있는 누구나 언제인가는 죽게 되어있다는 삶의 비극성이, 이제 죽음이 있기에 오늘의 삶이 귀중하다는 새로운 인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삶의 유한성, 즉 죽음에 대한 인식은 삶의 귀중함을 일깨우는 것이요, 지금 살고 있는 삶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높이게 된다. 죽음을 상상하라. 죽음을 잊지 말라. 그러면 살아있다는 것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오래오래 살고 싶은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희망 일 뿐, 진화의 법칙에서 그같은 사정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 다. 나에게는 잔인한 일이지만, 그래야 지구상의 모든 개체 가 평화롭게 사는 환경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나는 죽어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당사자 로서의 집착을 떠나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생각한다면 죽 음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렇기에 너무 슬퍼할 일 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죽기에는 충분히 늙어 있다”며 인간을 가리켜 ‘죽을 자(das Sterbliche)’라고 했다. 산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인간은 원래 자기의 선택과 의지에 따라 세상에 태어난 존재가 아 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도 모르게 세상에 던 져졌을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 속에 던져진 존 재이며, 죽음을 향해 가는 불안한 존재다. 인간은 끝에 이 르면 존재가 사라지고, 끝에 이르지 못하면 전체 존재에 이 르지 못한다. 그렇기에 내가 누군지 말하기가 어렵다. 죽어 서야 내 모습은 완성된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굳이 피할 필요는 없다. 죽음의 불안을 마주 보고, 죽음까지 가는 길을 내 삶을 완성시켜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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