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법무사 11월호

신명은 잃어버리고 상처 입었던 나의 가치가 온전히 풀려나와(흥의 과정) 밖으로 표출되어 밝게 빛나는 마음이다.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함은 사라지고 즐겁고 흥겹고 신이 나다 못해 가슴이 터질 것같이 흥분되고, 너와 내가 구별되지 않고, 나와 세계가 물아일체가 되어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끝없이 넘쳐나오는 감정인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끝없이 신명을 추구한다. 들을 받아들이고 견뎌내는 과정에서 체화한 문화적 정 서다. 그러나 한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잃 어버린, 손상된 나의 가치를 되찾아야 한다. 내게 닥친 불행에 내 탓을 한다는 것은 내 할 바 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일어 날 수 없을 만큼 짓밟힌 이들도 있었지만, 살아 있는 사 람들은 한을 동력으로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두고 보자. 내가 배워서, 돈을 벌어서, 힘을 길러 서 이 한을 풀겠다. ‘해한(解恨)’의 동기다. 쓰러져도 쓰 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서 손꼽히는 경제 대국으로 일어선 한국의 문화적 탄 력성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손상된 자기가치를 회복하는 과정은 처음에는 그 리 즐겁지 않다. 억울하고 서글프고 처량하고 서럽다. 그럼에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상황이 나아지는 것이 느껴진다. 밖에서 보 기엔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이지만 중요한 변화가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예전과 똑같은 일을 해도 즐겁 고 힘이 난다. 이제는 나의 가치를 되세우기 위한 일이 기 때문이다. 급기야 언젠가는 내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찾아온다. 이것이 ‘흥(興)’이다. ‘흥’이란 말 그대로 나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일어 난다’는 뜻이다. 삶에서 되찾은 통제감, 내일에 대한 희 망, 나의 가치가 서서히 회복되어 드러나는 설렘과 즐 거움, 가슴속에서 일렁거리는, 더욱더 나를 드러내고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이 바로 ‘흥’인 것이다. 해서 한국인들은 뭘 하든 흥이 나야 한다. 흥이 나야 비로소 사는 의미와 재미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을 ‘흥의 민족’이라 부르는 이유다. 예전에 한국인을 ‘한(恨)의 민족’이라 불렀다. 적 어도 대략 1990년대 초중반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정 서는 한(恨)이었다. 이는 근현대 한국이 경험한 한스러 운 역사와 관련이 있다. 망국과 일제강점기, 동족상잔 과 이산가족의 아픔, 홍수와 같은 시대의 흐름에 휩쓸 려가던 개개인들의 삶은 한(恨)이라는 정서로 형상화 되었다. 문화심리학적 관점에서 ‘한(恨)’은 ‘자기 가치와 통제감의 상실’을 의미한다. 내 뜻과 관계없이 일어나 는 불행은 나의 존재가치를 찾기 어렵게 한다. 슬프고 분하고 원통한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깨달음, 거기에 그런 일들을 당한 이유가 스스로의 가 치가 보잘것없어서란 깨달음이 덧붙는다. 사람들은 이런 슬프고 분하고 원통한 감정을 삭 여야 한다. 그런 감정이 향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시대 탓을 하자니 시대는 인격과 의지가 없고, 권력 탓을 하 자니 당장에 끌려가 죽을 것이 걱정이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그대로 지니고 살자니 하루하루를 견디기가 힘 들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 탓’을 하기 시작한다. 내가 못 배워서, 돈이 없어서, 힘이 없어서 이 억울한 일을 당했구나, 우리가 힘이 없어서 나라를 빼앗겼구나, 우 리가 힘이 없어서 이 부당한 일을 당하는구나. 한을 동력으로 다시 일어서는 과정, ‘흥’으로 승화 한(恨)은 한국인들이 자신에게 닥친 부정적인 일 ┃ 슬기로운 문화생활 한국인은 왜 71 2023. 11 vol.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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