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vol.678 만 할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파편화된 시대 상황 속에서 종교, 국가 등은 결속력을 잃었고, 모든 것이 기술과 통계로 설명된다. 그래서 사람들 은 개성을 가진 개인이 아닌, 반복되는 타입의 변형으로 해 체되어 실존의 위기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주인공 ‘울리히’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특성들에 무관심하고 이 특성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특성 없는 남자’이다. ‘특성 없음’은 완성되어 주어진 세상에 대한 거부인 동 시에 ‘나’에 대한 요구, 나의 삶에 대한 요구이다. 소설에서 울리히는 끊임없이 기존의 삶과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 색한다. 무질의 바람처럼, ‘특성 있는 남자’를 요구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특성 없는 남자’가 되어 나의 개성을 지키 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삶은 자신에 대한 사랑 위에서 가능하다. 우리의 삶이 어렵고 힘들수록 자신에 대한 사랑은 소중하다. 우리 는 무엇에 실패했을 때, 혹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자 신의 무능력이나 처지를 낙담하며 자책하기 쉽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겪게 되는 많은 어려움이 꼭 내 탓만은 아니다. 세상의 일들이 내 의지대로만 되는 것도 아 일거리를 다 떠맡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나보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 위에 있거나 영향력을 가진 사람 앞에 서면 나의 생각은 작아지는 경향이 있 다. 실제로 우리는 흔히 사회적 명망을 가진 사람들이나 인플루언서들의 말이 라면 쉽게 믿고 따르는 습관이 있다. 그 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영향력 때문이 기도 하고, 집단 속에서 사고하려는 안 이함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프랑스 역사학자 폴 벤은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에서 “진실들 사이의 관계는 힘의 관계”라고 말했다. 사람은 상대가 존경스러운 인 물인 경우에 그가 하는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많은 경험을 했듯 이, 사회적 지위나 영향력이 진실을 무 조건 보증하는 것일 수는 없다. 결국 우 리는 다른 누구의 어떠한 견해에 대해 서도 의심하고 회의할 수 있는 성찰의 태도를 내려놓지 말아야 한다. 누구의 얘기가 진실인가는 사회적 권력관계에 의해서 가려질 문제가 아니 다. 진정으로 깨어있는 사람은 어떤 우 상도 만들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사랑,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힘 자신의 얼굴을 잃지 않고 살아가 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로베르트 무질 의 소설 『특성 없는 남자』는 분열된 나 라 ‘카카니아’의 상황과 이를 통일할 하 나의 위대한 이념을 찾으려는 ‘평행운 동’에서 이념과 반대이념들이 부딪치기 우리는 흔히 모방하는 삶을 살아간다. 영웅과 성공한 사람을 모방하고, 동료들을 모방한다. 가치도 생각도 모습도, 살아가는 방식까지도, 사회는 그들의 삶을 따라 살라고 가르쳐왔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삶이 아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의 삶이다. 나만의 색깔이 도는 내 얼굴을 가지고. ┃ 법으로 본 세상 그럼에도 행복하고 싶다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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