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전파 화가들의 뮤즈였다. 하지만 로세티의 바람기를 막지는 못했고, 결국 결 혼생활의 불행을 약물로 잊고자 했던 그녀의 선택은 죽 음으로 끝맺는다. 화가는 뒤늦게 후회했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새로운 뮤즈인 ‘제인 모리스’를 만날 때까지 그 의 삶은 죄책감에 약물과 알코올로 점철된다.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윌리엄 모리스의 부인인 제 인은 새로운 라파엘전파의 뮤즈였다. 그녀는 로세티의 여러 작품에서 히로인으로 분하여 나타난다. 로세티의 작품 속 여인들은 하나같이 풍성하고 굽실거리는 긴 머리, 다소 각진 얼굴형, 그리고 짙은 눈 썹 아래 뚜렷한 이목구비가 매력적인, 선이 굵은 미인 이다. 로세티의 확고한 취향도 취향이지만, 결국 그의 뮤즈들은 화가가 그리고자 했던 이상적 여인상의 모델 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여인과 꽃을 즐겨 그린 로세티, 뮤즈 제인의 초상화 중세적 순수를 추구한 로세티는 여인과 함께 꽃 을 즐겨 그렸다. 그중에서도 1873년 작품 「설강화 (Blanzifiore)」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의외로 그는 이 작고 소박한 꽃을 그리는 데 영 흥미가 없었던 듯하고, 모델의 취향이 반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탐스러운 붉은 웨이브 머리에 앵초를 꽂은 제인은 한 손에는 작고 하얀 설강화를 든 채로 고개를 살짝 돌 려 화가를 응시하고 있다. 입술은 꼭 다물고 있지만 깊 고 푸른 눈에서는 무언의 사연이 느껴진다. 하층민의 딸로 태어나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유한 남자와 사랑 없는 결혼을 한 그녀는 남편 의 친구와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 상태다. 체면을 중시 하는 남편의 묵인 아래 휴가기간은 연인과 함께 지내 며 뮤즈이자 여인으로서 행복을 누렸지만, 로세티는 불안한 사람이었다. 약물중독으로 망가진 그는 제인과 제인의 어린 딸에게도 위험했다. 그녀는 점점 로세티 와의 관계가 버겁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그녀가 선택한 설강화의 꽃말은 ‘희망’이다. 끝이 보이는 로세 티와의 사이에서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굴 곡 많은 인생에서 끝까지 잃지 않았던 희망을 다짐하는 것일까? 차이코프스키의 「갈란투스」, 예술을 통한 희망과 구원 로세티와 제인의 금단의 러브스토리에 한때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밀회」가 떠오른다. 주인공인 혜원과 선재의 파격 적인 나이 차이도 그렇지만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이 돋보였던 멜 로드라마였다. 재미있게도 주인공들의 만남이 시작되는 극 초반 에 러시아 작곡가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가 작곡 한 피아노 소품 「갈란투스(Galantus, 설강화)」가 연주된다. 차이코프스키는 음악잡지 『누벨리스트』의 의뢰로 1년 동안 매달 그달에 맞는 시를 선택하여 이에 어울리는 피아노 소품을 발 표했는데, 4월의 「갈란투스」는 시인 마이코프의 1857년 작품 「봄」 을 차용하여 새로 맞이하는 생명과 설렘을 의미한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늦게 봄이 찾아오는 러시아에서 4월 의 의미가 남다름을 다음과 같은 시구를 통해 알 수 있다. “지나간 고통의 마지막 눈물, 그리고 다른 행복의 첫 희망” 가볍고 경쾌하게 시작하는 멜로디에서 이미 피아노 협주곡 1 번 초연을 성공한 대가의 자신감과 여유가 느껴진다. 곡의 구성은 단순하지만 간간이 곁들여지는 장식적인 아르페지오로 지루하지 않다. 무심히 찾아오는 봄에서 느껴지는 새로운 설렘을 표현한 것 일까? 곡 전체에 러시아 특유의 이국적인 서정과 멜랑콜릭함이 가득하다. 밀회의 혜원은 선재의 연주를 들으며 껍데기뿐인 삶 속에서 알 수 없는 희망의 설렘을 느꼈을 것이다. 허울만 화려한 삶에 매몰되 어 살다 불시에 만난 연인과의 예술적 교감을 통해 구원받고 결국 자유를 얻는 혜원의 모습은 제인 모리스의 모습과 묘하게 겹친다. 모든 것이 죽어버린 황무지에 하얀 설강화가 가득 피어나는 상상을 해본다. 세상의 모든 삶은 결국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새로운 희망의 움을 틔워 내기에 혹독하지만 아름답다. 그리하기 에 생은 어떤 경우에도 계속되어야 한다. WRITER 최희은 미술·음악 분야 작가 · 번역가 79 2024. 04. April Vol. 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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