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법무사 5월호

조정을 받아들여 조정기일에 참석했던 K 씨가 일을 마치고 사무소로 전화했다. 3회 분할로 100만 원을 주기 로 했고, 대신 서로의 사건을 모두 취하키로 했단다. 채 권자는 부동산처분금지가처분을 취소하고, 우리 측은 추후보완항소를 취하하는 것으로. 이미 소멸시효 다 끝난 채권을 100만 원이나 주는 것이 너무 아까웠지만, 빨리 사건을 정리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고픈 K 씨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결국 2023년 10월, 조정성립으로 4개월에 걸친 사해행위취소 소송은 일단락되었다. 아버지의 새로운 채무 발견, 그리고 뜻밖의 부고 그러나 K 씨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얼 마 후 아버지의 다른 채권자가 또 독촉장을 보내왔다며 상담을 요청해온 것이다. 채권자는 “○○대부”였다. 아마 2002년 당시 갚지 않은 채무가 양도, 재양도 되면서 알 수 없는 대부회사로 채권이 계속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이럴 때는 파산신청을 해야 한다. 개인회생은 목록 에 적지 않은 채권자에게는 면책 효력을 주장할 수 없으 나, 파산은 악의로 기재하지 않은 채권 외에는 면책 효력 이 미치기 때문이다. 나는 K 씨에게 아버지를 설득해 파산 서류를 준비 하고 얼른 방문하라고 일렀다. 하지만 K 씨는 한 번씩 채 권자가 독촉을 할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하냐는 상담만 할 뿐, 적극적으로 파산 준비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 무래도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딸에게 또다시 부담을 주 는 것 같아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K 씨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고였다. 2023년 12월이었다. 한 번도 얼굴을 뵌 적은 없지만, 그 인생의 처연함이 밀려 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분의 채무관계나 그 딸인 K 씨가 그간 고생한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통화는 자연스럽 게 상속 한정승인 사건 접수에 관한 상담으로 이어졌다. K 씨에 따르면, 사해행위 사건이 정리된 후에도 대 부업체로부터 2건의 큰 금액에 대한 독촉이 이어졌다고 한다. 동사무소에 사망신고를 할 때 안심상속 원스톱 서 비스를 신청해 아버지의 채무를 찾아보았더니 캠코(한 국자산관리공사)에도 채무기록이 있었다. 채무자 본인이 살아있다면 소멸시효 완성 여부가 중요하지만, 한정승인의 경우는 상속받은 재산이 없다 면 채무상환책임도 없다. 따라서 남아있는 채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멸시효 완성을 따지는 것보다 채권 을 누락시키지 않고 최대한 찾아내 채무자가 사망했다 는 사실과 상속인이 한정승인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상 속된 재산이 없으므로 상환할 돈이 없다는 사실을 명백 히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정승인, 채무의 연좌제 끊는 일 상속재산 7만 원, 상속채무 7,000만 원. K 씨의 아 버지가 남긴 상속재산 목록이다. 돈으로 인생의 성적을 매길 수는 없겠지만, 재산과 채무를 한 사람이 사망 후 남긴 인생의 흔적으로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장례비조차 남기지 못한 고인의 한정승인 절차를 진행하면서 마음 한구석에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그분의 마지막이 너 무 쓸쓸하지는 않았기를…. 잔고로 한 사람의 인생을 감히 예단할 수는 없겠지 만, 경제적으로 곤궁할수록 사회적으로도 고립되는 것 이 현실이다. 나는 한정승인을 남겨진 상속인들이 망자 의 채무를 잘 정리하고 수습하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 도록 돕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채무의 연좌제를 끊는 일’이라고나 할까. 아버지의 채무 때문에 1년여의 시간을(어쩌면 훨씬 더 오래) 속상해하고 애를 끓였을 K 씨가 이제는 부디 자 신의 삶에 집중하며 항상 행복하고 즐겁기를 소망한다. WRITER 김선미 법무사(경기중앙회) 13 2024. 05. May Vol. 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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