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한 가정의 평화로운 일상을 깨트리는 예상 치 못한 인물의 등장을 화가는 왜 화폭에 담았을까? 그림 속의 배경은 지극히 평범한 응접실이다. 방 한쪽 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에, 커다란 유리 창문, 깔끔한 벽 지 그리고 멀끔하게 차려입은 가족들의 옷차림을 보아 하니 유복한 지배계층의 가정집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응접실에 모여 피아노 연주와 책을 읽으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하녀가 문을 열고 한 남자의 방문을 알린다. 약속되지 않은 방 문이라 모두 의아해하면서도 불쾌했을 것이다. “도대체 누가?” 하녀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남루한 차림의 사 내를 안내한다. 비단 옷차림뿐 아니라 고생에 찌든 다 소 사나운 듯한 인상에 겁을 먹었을 수 있다. 하녀가 문을 열자마자 사내는 성큼성큼 자연스럽게 방으로 들어온다. 제집처럼 말이다. 의아해하던 가족들은 사 내를 알아보자마자 경악을 금치 못한다. 피아노를 치고 있던 여자는 사내의 뒷모습만 보고 는 놀라서 연주하던 손을 떨어트린다. 사내아이는 기억 속 저 너머의 누군가가 떠오른 듯 반가움을 감추지 못 한다. 그보다 어린 여자아이는 두려움과 불쾌함에 얼 굴을 찌푸리며 몸을 웅크린다. 집안의 웃어른인 늙은 여인은 마치 유령을 본 듯 놀라서 몸을 벌떡 일으킨다. 죽었다고 생각한 남편이, 아버지가 그리고 아들이 돌 아왔다. 등장인물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사내는 방 한가운데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다. 수년 전 그는 압 제에 항거하며 혁명가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정치범으 로 몰려 투옥되었다. 웃음기 없는 야윈 얼굴에 번뜩이 는 눈빛이 그가 겪어온 고초를 말해준다. 본능적으로 집을 찾아왔지만 가족들에게 그는 잊힌 사람이었다. 그간의 시간이 이 한 장면에 모두 담겨있다. 사내 가 겪은 고초뿐 아니라 남은 가족들의 고통 역시 말이 다. 기다림과 포기를 반복하며 사내의 부재를 받아들 인 기나긴 시간 말이다. 가장보다는 혁명가로의 길을 택한 그가 원망스럽지 않았을까? 그의 부재는 서서히 당연한 것이 되었고, 어느 순간 더 이상 그를 입에 올리 지 않았을 것이다. 기다리던 이와의 재회를 다루기에 한편 희망적이지만 그간의 고통이 읽히기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복잡한 심경 속에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더 많았음을 문득 깨닫 는다. 러시아 소수민족 시인의 시 「백학」, 전몰용사 기리는 곡으로 재탄생 돌아오지 못한 이들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러시아 소수민족 아바르 출신의 시인, 라술 감자토프(Rasul Gamzatov, 1923~2003) 가 쓴 시, 「백학」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피로 물든 들녘에서 돌아오지 않는 병사들이 잠시 고향 땅 에 누워보지도 못하고 백학으로 변해 버렸다.” 감자토프가 「백학」을 쓰게 된 계기는 확실치 않지만, 가장 정 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히로시마를 방문한 후 종이학을 든 소녀상을 보고 영감을 받아 썼다는 이야기다. 이후 아바르어로 쓰 인 시는 친구인 나움 그레브네프에 의해 아바르어에서 러시아어 로 번역된다. 번역된 시에 감명을 받은 유대인 가수, 마르크 베르네스가 우 크라이나 출신 작곡가 얀 프렌켈에게 곡을 의뢰하여 음악으로 탄 생되는데, 가사의 내용 때문에 우리나라의 가곡 「비목」처럼 전몰 용사를 기리는 곡으로 바뀌며 러시아의 전승기념일마다 빠지지 않고 불리고 있다. 지금의 국제정세를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결국 대의란 시대에 따라 변하는 덧없는 것이고, 그런 대의 때문 에 희생되는 청춘들의 허무한 죽음만이 안타까울 뿐이다. 비장한 허밍으로 시작하는 「백학」은 우리에겐 드라마 「모래시 계」의 OST로 잘 알려져 있지만, 애석하게도 가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단지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는 이유로 전장에 끌려 나가 이른 나이에 삶을 마감한 이들은 새하얀 학이 되어 홀연히 자유롭게 날 아가 버린다. 남은 이들의 절절한 기다림을 뒤로한 채로 말이다. 나의 일이 아니더라도 마음이 저려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이 세상의 모든 전장에서 싸우는 이들이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본다. WRITER 최희은 미술·음악 분야 작가 · 번역가 79 2024. 06. June Vol. 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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