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종종 외면 받았지만, 곧 ‘프리츠 탈로’라는 화가이 자 예술 후원자의 눈에 들게 된다. 그리고 갓 스무 살이 된, 재능이 넘치지만 병약한 청년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1885년 후원을 받아 방문한 파리에서 만난 세 살 연상의 아름다운 여인, 밀리 탈로. 그녀는 후원자였던 프리츠 탈로의 형수였다. 뭉크에게 밀리는 인생의 유일무이한 첫사랑이었지 만,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그녀에게 뭉크는 수많 은 추종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 육 년이라는 시간 동안 순정을 바쳤건만, 밀리는 미망인이 되자마자 다른 남자 와 재혼했다. 뭉크에게 남겨진 건 상처뿐이었다. 이 고통 은 오래도록 남아 그의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이후 그 의 애정사는 늘 파국의 반복이었다. 뭉크의 작품에는 사랑으로 인한 고통, 불안, 불륜, 질투 등 그가 여인들을 만나 느꼈던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에게 여인들이란 어린 시절 요절했던 누나 처럼 연약하고 순진한 존재이기도 했지만, 대부분 배신 을 하고 그에게 질투와 고통을 주는 팜므 파탈들이었다. 그중 1895년 발표한 「사랑과 고통」에도 붉은 머리 의 팜므 파탈이 등장한다. 붉은 머리를 길게 치렁하게 늘어뜨린 여인, 바로 첫사랑이었던 밀리 탈로다. 화가는 그저 여인이 남자의 목에 입맞춤을 하는 그림이라 설명 했지만, 화가의 친구는 그 작품에 “뱀파이어”라는 부제 를 붙였는데, 더 많은 공감을 받았는지 원제보다 더욱 유 명해졌다. 그림 속의 치렁하게 길게 늘어뜨린 여인의 붉은 머 리카락은 마치 흐르는 피처럼 보인다. 여인의 무릎에 고 개를 묻은 남자의 옆얼굴은 파랗게 질려 마치 죽은 사람 같다. 여인도 위로하듯 남자의 목에 얼굴을 묻고 있다. 어두운 배경에 표정을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분위기는 퇴폐적이면서 기괴하기도, 어찌 보면 슬프기까지 하다. ‘뱀파이어’라는 부제처럼 사랑에 빠진 남자는 여인 에게 목숨까지 내어준 것일까?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한 관계의 끝은 무엇일까? 남자의 목에 얼굴을 묻고 있는 여인은 웃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그녀도 그를 사 랑하는 것일까? 고통의 원인이 사랑임을 알고 있음에도 사랑을 부정하지 못하는 화가의 고통이 느껴진다. 시에서 영감 얻어 작곡한 「정화된 밤」, 숭고하고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 1899년,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사랑 하는 여인과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스물다섯살의 그는 리하르 트 데멜의 시집 『여인과 세계』 중 「두 사람」이라는 시에 영감을 받아 「정화된 밤」이라는 현악 6중주곡을 발표한다. 단악장의 형식으로 작곡된 이 곡은 최초의 현악합주로 이 루어진 표제음악이라 할 수 있다. 쇤베르크의 초기작품이니만큼 난해하지도 않고, 반음계 기법이 자주 사용되기는 하지만 당시 지배적인 낭만주의적 사조를 따른 비교적 듣기 쉬운 음악이다.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사랑에 빠진 젊은 청년이 어째서 이 시에 감동을 받았는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달밤에 숲속을 산책 하는 연인들의 대화로 이루어진 이 시는 지금 들어도 굉장히 파 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하얀 달빛만이 비치는 고요한 숲속을 산책하던 중 여인이 머뭇거리다 고백을 한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노라고…. 남 자는 혼란스러워하지만 이내 곧 자신의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 이며, 아이 또한 받아들이겠다고 맹세한다. 남자의 용서를 상징하는 달빛을 통해 불륜의 씨앗인 아이 는 축복으로, 여인의 배신으로 더럽혀진 그들의 관계는 숭고한 사랑으로 정화되고 승화된다. 달빛을 받으며 두 사람은 굳게 사 랑을 맹세하고 음악은 조용히 끝을 맺는다. 여인의 떨리는 음성과 남자의 복잡한 심정, 그리고 신비로 운 숲속의 풍경까지 청각적으로 탁월하게 묘사되어 마치 한 편 의 짧은 단막극을 듣는 기분이다. 사랑에 대한 확신에 가득 찼던 쇤베르크는 낭만에 가득 찬 아름다운 작품을 남겼지만 안타깝 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아내 마틸데가 젊은 화가와 사랑에 빠져 그를 떠나버린 것 이다. 다행히 짧은 불장난이었는지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쇤베 르크로서는 청천벽력이었을 것이다. 그가 음악 속의 남자처럼 아내를 완벽히 용서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 덕분에 수많은 예술 작품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끝이 어떻든 말이다. WRITER 최희은 미술·음악 분야 작가 · 번역가 79 2024. 09. September Vol. 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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