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법무사 10월호

했을 정도라고 하니 이해할 수밖에 없었지만, 도무지 사건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나는 의뢰인이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 리기로 하고, 그렇게 2주 정도가 지나서야 비로소 사건의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형사 사건은 사실 확인에 신중해야 한다. 수사관은 증 거를 중심으로 사건을 새롭게 구성해 사건의 성립 여부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수사관을 정의의 심판자로 생각해 모 든 것을 알아서 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으면 곤란하다. 가해자와의 첫 만남과 10년간 이어진 가스라이팅 의뢰인은 10년 전인 대학 시절, 고액의 아르바이트 광 고를 보고 찾아간 학교 근처 키스방에서 일정기간 일한 적 이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현직 약사인 가해 자였다. 그는 의뢰인보다 나이가 12살 이상 많은 유부남이 었지만, 미혼이라고 속였다. 둘은 깊게 사귀었으나 다툼 끝 에 헤어졌다. 대학을 졸업한 의뢰인은 한 술집에서 일하게 되었는 데, 가해자가 찾아와 월 300만 원의 조건만남을 제안하며 다시 만남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다툼이 생겨 헤어졌고, 이후 의뢰인이 만나주지 않자 가해자는 협박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 의뢰인은 모텔에서 가해자가 샤워하는 사 이 그의 부인에게서 온 전화를 보고, 그의 거짓말을 알아 차리고는 홧김에 가해자의 상반신을 촬영해 그의 부인에 게 전송했다. 이후 가해자는 의뢰인을 불법촬영 혐의로 고 소하겠다며 협박했고, 의뢰인에게 고소 접수증을 보여주 며 실제로 고소했다고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 공포를 느낀 의뢰인은 용서를 구하기 위해 지방에 있 는 가해자의 약국을 찾아갔고, 그때부터 원치 않는 성관계 가 시작되었다. 의뢰인은 가해자의 요구에 따라 그의 퇴근 시간에 맞춰 택시로 50분이 걸리는 약국까지, 일주일에 두 세 번씩 마치 출근하듯 찾아가 무릎을 꿇은 채 용서를 빌 어야 했고, 그 속죄의 의식이 끝나면 함께 식사를 한 후 인 근 모텔로 갔다. 이런 생활이 100회 정도 반복되었고, 가해자가 원하 ‘법적 처리와 심리적 처방’의 성공적인 두 가지 사례 사건 1 강간 고소사건과 무고죄 역고소의 위험 - 10년간의 성 착취에 무너진 의뢰인의 법률심리 치료와 회복 2021년 9월 26일. 정확히 3년 전 오늘이다. 추석이 지 난 토요일 밤 9시경, 장인 상(喪)을 치르고 추적추적 가을 비가 내리는 밤, 운전하여 집으로 가는 길에 모르는 이에 게 전화가 왔다. “한 남자를 강간죄로 고소했는데, 오히려 제가 무고죄 로 처벌받을 상황이 되었어요. 경찰서에서 다음 주 화요일 에 조사를 받으러 오라고 하는데, 도와주세요. 그 사람은 나를 반드시 감옥에 보낼 사람이에요. 홈페이지에 있는 법 무사 명단을 보고 전부 전화했는데 법무사님만 제 전화를 받아주셨네요. 감사합니다.” 휴대폰 너머 들려오는 젊은 여성의 절박한 호소에 나 는 “내일 오전 10시에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다음날 사무 실로 찾아온 의뢰인은 준수한 외모의 32세 미혼 여성이었 다. 그녀는 내 아들과 같은 고등학교 선배로서의 친근감을 강조하며, 1층 편의점에서 커피까지 사가지고 오는 등 부드 러운 분위기를 만들고자 애를 썼다. 그런데 정작 고소장은 가져오지 않았다(나중에 알고 보니 낙서에 가까운 문장들이 적힌 한 장짜리 고소장이었 다). 그녀는 경찰서 현관에 몇 번이고 갔지만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울며 돌아왔다고 했다. 나는 우선 고소인 조사 연기 신청서를 접수키로 하고, 의뢰인부터 진정시켰다. 미소를 보이다가도 사건 이야기만 나오면 갑자기 얼굴이 어두워지며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 고, 상담 소파에도 가만히 앉아있지 못해 짧은 치마를 입 은 다리를 계속해서 좌우로 비틀거나 소파에 비스듬히 눕 는 등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조금만 상담분위기가 심각해져도 말문이 막히며 심 리적 공황상태에 빠지는 의뢰인을 보자니 이러다 무슨 사 고가 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자살 시도를 몇 차례 Part. 2 59 2024. 10. October Vol. 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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