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님처럼 테이블 중심에 앉아있다. 당시 결혼식 관습에 따라 신부는 음식에 손을 대 면 안 되기에 열심히 음식에 집중하고 있는 하객들과 는 달리 다소곳이 양손을 모은 채로 미소만 짓는 중이 다. 신부의 부모 역시 그녀의 왼쪽에 앉아 축하해 주러 온 하객들을 주최자로서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다른 이들과 차별되는 복장을 한 두 사람이 눈길을 끈다. 한 명은 프란체스코회 수도 사이고, 다른 한 명은 긴 칼과 화려한 복장으로 보아 영주나 농지의 관리인 또는 판사로 추정된다. 이들은 단순한 하객이 아니라 결혼식의 공증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허름한 창고를 개조한 결혼식장 벽에 걸린 큼직한 황금빛 볏집이 계절을 짐작하게 한다. 이제 막 식사를 시작했는지 문 밖에는 하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두 청 년은 떼어낸 문짝을 상처럼 이용해 수프를 나르고 있 는데, 백파이프를 든 악사 중 한 명은 허기를 느꼈는지 본업을 잊고 수프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중이다. 사실 음식들을 보면 단출하기 짝이 없다. 고기는 커녕 빵과 수프, 그리고 열심히 주전자에 담기고 있는 맥주가 전부이지만 귀족들의 성대한 만찬이 부럽지 않 다. 하객들은 마치 진수성찬을 즐기는 듯 정신없이 음 식을 먹고 나르고 기다리고 있다. 그림 속의 모든 요소들이 의미를 지니고 있어 허투 루 지나칠 수 없다. 특히 가득 쌓여있는 빈 주전자는 신 기하게 마르지도 채워지지도 않는데, 이는 성경 속의 유 명한 이야기인 가나의 혼인잔치를 떠오르게 한다. 그러면 이제 이 시끌벅적함을 비집고 신랑을 찾아 보자. 신부 또래의 젊은 청년들은 대부분 열심히 음식 을 나르는 중이다. 신부의 왼편에 앉아 열심히 수프를 먹는 검은 모자의 청년, 그림 앞쪽의 술을 따르는 청년, 음식을 전달하는 청년 등 모두 그럴듯해 보이지만 무 언가 애매하다. 불확실한 신랑의 존재에 대해 다양한 가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가설에 따르면 당시에는 신랑이 결혼식 저녁까지는 신부 앞에 나타나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신랑은 그림 밖 어디 에서인가 어서 해가 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비발디의 「가을」, 18세기 농부들의 가을 일상 탁월하게 묘사해 이처럼 브뤼헐이 묘사한 시끌벅적한 풍요로움과 유쾌함에 어울리는 음악을 꼽으라면 당연히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비발디 의 작품 『사계』 중 「가을」이 떠오른다. 비록 시대도 다르고 지역도 다르지만 세속적인 가을의 일상을 이처럼 정확하고 탁월하게 묘 사한 음악이 또 있을까? 작곡가가 손수 작성한 소네트를 살펴보면 1악장에서는 고단 한 농번기가 끝나고 농부들이 춤을 추며 술, 음식과 함께 축제를 즐기는 장면이 묘사된다. 현란한 바이올린 솔로의 기교와 이를 따 르는 현악합주에는 즐거움만이 가득하다. 이어 2악장에서는 시끌벅적함이 잦아들고 고요한 풀벌레 소 리가 들리면서 농부들은 나른한 단잠에 빠져든다. 적막함이 길어 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3박자의 크고 빠른 춤곡으로 시작되는 3악 장이 이어진다. 가을의 연례행사인 사냥장면이다. 사냥감을 잡으러 여기저기 숲속을 뛰어다니는 사냥꾼들의 모습이 현악기 특유의 화려함으로 연주되며 가을의 절정이 묘사 된다. 사냥감들에게는 잔인한 시간이겠지만 당시 사냥은 결혼식 만큼 중요한 가을 행사였다. 이 또한 자연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재밌게도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영향을 받은 브뤼헐과는 반대로 18세기 비발디의 음악은 브뤼헐이 살던 플랑드르악파 음악가들의 다성음악 영향으로 탄생되었다. 하지만 당시 농부들 에게 다성음악은 꿈을 꿀 수 없는 청각적 사치였다. 다수의 숙련 된 연주자가 필요한 다성음악은 시간과 자본이 충분한 지배계층 에게만 허용된 문화생활이었기 때문이었다. 「농부의 결혼식」에서 보여지듯 결혼식에 초대된 두 사람의 백파이프 연주자의 연주곡이 교회성가를 제외하고 농부들이 누 릴 수 있는 최대의 문화적 사치였을 것이다. 브뤼헐의 그림과 지금은 지겹도록 들을 수 있는 비발디의 『사 계』를 감상하며 풍요와 행복의 상관관계에 의문이 든다. 어쨌든 올해의 가을은 지나갈 것이다. 물질적 행복도 중요하지만 소중한 이들과 가진 것에 감사하며,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쌓는 것이 신의 섭리에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아닌가 싶다. WRITER 최희은 미술·음악 분야 작가 · 번역가 79 2024. 10. October Vol. 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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