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구상들은 새로운 위치에서 고객 접근성과 매출 하락이 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특히 상가 이전 후에도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워 상권이 약화되었다. 청계천 공구상가의 침체는 2020년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코로나19는 전 세계 경제 를 마비시켰고, 공구상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건설업과 제 조업의 경기 침체로 인해 공구와 부품의 수요가 급감했으 며, 방역 규제로 인한 영업 제한과 고객 유입 감소가 이어 졌다. 상가 운영자 대부분이 고령화된 상황에서 젊은 세대 는 공구상 운영을 이어받으려 하지 않았고, 후계자 부족 문제는 상권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현재 청계천 공구상가는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 어려 운 상태다. 그러나 상인들은 생존을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일부 상인들은 온라인 쇼핑몰을 통 해 비대면 판매를 시도하며, 디지털 전환에 발맞추고 있다. 또한, 대형 공구업체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소 규모 맞춤형 제작과 같은 전문성을 강화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서울시와 관련 기관들은 청계천 상가의 활성화를 위한 지원책을 모색 중이지만, 이러한 노력만으로 쇠락한 상권을 완전히 부활시키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청계천의 쇠락은 단지 상권의 몰락이 아니라, 그로 인해 빚더미에 앉아 삶의 터전을 잃은 상인들의 고단한 현실을 드러낸다. 법률가의 시선에서 보면, 공구상 자영업 자들이 남긴 채무를 정리하는 과정은 단순히 법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넘어, 한 시대를 이끌었던 사람들의 무너진 꿈과 삶을 정리하는 일이다. 청계천 공구상가와 함께 몰락 한 상인들의 이야기는 법과 제도가 인간의 존엄을 다시 세우는 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명의만 공구상 사장이었던 어머니의 파산신청 청계천을 삶의 터전으로 하여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 을 낳고 키우며 살아왔던 지난 세월이 깊게 파인 어머니 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전남편과 함께 운영하던 공구상은 어머니 명의였고, 반평생을 곁에 했을 때부터 IMF,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오기까 지, 이 가족의 사연에는 산업화 시대를 넘어 우리 사회의 영욕과 부침을 함께 겪어온 서민들의 애환과 눈물이 고스 란히 담겨 있었다. 대한민국 산업화의 심장, ‘청계천 공구상가’ 영락의 역사 청계천 공구상가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 반까지 대한민국 산업화의 심장부로 자리 잡았다. 제조업 과 건설업이 전성기를 맞이하던 시기, 전국 각지의 소규모 제조업체와 기술자들이 청계천에 모여 공구와 부품을 공 급받았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청계천은 교통 접근성이 뛰어나고, 대규모 상가를 조성하기에 적합한 환경이었다. 이러한 입지적 이점을 바탕으로 청계천은 공구산업의 허 브로 발전하며, 소규모 자영업자들과 기술자들에게 필수 적인 공급처로 자리잡았다. 당시 청계천 공구상가는 건설 업과 제조업의 급성장을 뒷받침하며, 대한민국 경제 발전 에 기여한 중요한 상권이었다. 그러나 1997년 IMF 외환위기는 청계천 공구상가에 도 큰 충격을 주었다. 경제위기 속에서 많은 중소기업이 도산하며 공구와 부품에 대한 수요가 급감했다. 상인들은 채무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고, 신용불량자가 늘어나면서 상가 운영이 점차 어려워졌다. 상권의 침체는 더욱 심화되었고, 공구상가의 활기는 빠르게 사라져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계천 공구상가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2003년 서울시는 청계천 복원사업을 추진하며, 도 심 환경을 개선하고 역사와 문화를 회복하려는 계획을 세 웠다. 자연형 하천으로 복원된 청계천은 시민들에게 쾌적 한 여가 공간을 제공했지만, 공구상가에는 또 다른 위기 가 되었다. 복원사업으로 인해 공구상들은 청계천 주변에서 이 전해야 했고, 상권의 핵심적인 위치를 잃게 됐다. 이전된 19 2024. 12. December Vol. 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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