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법무사 12월호

2017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의 위대한 정서적 힘을 통해 인간과 세계를 연결하고, 그 환상적 감 각 아래 묻힌 심연을 발굴해 온 작가”라는 평을 받았다. “즉, ‘품위’는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집사의 능력과 결정적인 관계가 있다. (…) 위대한 집사들의 위대함은 자신의 전문 역할 속 에서 살되 최선을 다해 사는 능력 때문이다. 그들은 제아무리 놀랍고 무섭고 성가신 외부 사건들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61쪽) 전문가적인 실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란 어떤 의미일까. 영국 달링턴 홀의 집사로 평생을 보낸 ‘스티븐스’는 단 순히 유능함을 넘어 ‘위대한’ 집사다. 그는 사적인 실존을 위해 결코 감정을 드러내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점잖은 신 사가 정장을 갖춰 입듯 자신만의 프로 정신을 입는다. 그가 옷을 벗을 때는 완전히 혼자일 때다. 자신의 전문 역할 속에서 살되 최선을 다해 사는 능 력, 이것이 그가 말하는 ‘품위’의 요체다. 그는 ‘달링턴 경’이 밀실에서 비공식 회담을 주재하고 외교 정책을 좌우하며 사교계의 중심인물로 살아가도록 삼십오 년간 그림자처럼 수행한다. 이를 위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내지만, 직업인으로 성장하는 것에 긍지를 갖는다. “그날 저녁 내내 ‘내 직위에 상응하는 품위’를 지키느라 애써야 했고, 게다가 내 부친도 자랑스러워하셨을 정 도로 잘 해냈다. 그리고 홀 건너편 내 시선이 머물고 있 는 문 뒤, 방금 내 직무를 수행하고 나온 바로 그 방 에는 유럽 최고의 실력자들이 우리 대륙의 운명을 논 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 누가 의심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집사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세상의 저 위대한 중심축에 거의 도달했다는 것을.” (300-301쪽) 전문가적 실존을 지키려 애써온, 한 남자의 삶에 대한 기록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맡은 역할을 소화하며 각 자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간다. 스티븐스는 자신이 모시 는 주인의 성장을 지켜보며 혼자만의 만족감을 느낀다. 사 교계의 중심인물인 달링턴 경의 성공에 감정 이입해 자신 의 소망도 이루어가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어쩐지 그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스티븐스가 “직위 에 상응하는 품위를 지키며” 자신의 직업에 헌신하는 모습 은 현대인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마침내 그가 위대한 주인과 함께 “세상의 저 위대한 중심축에 거의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즈음, 달링턴 경은 오명을 쓰고 최후를 맞는다. ‘위대한 집사’로 헌신해 온 그의 신념과 맹목적인 충성 심은 길을 잃는다. 인생의 황혼녘에 허무와 맞닥뜨린 그의 ‘품위’는 회복될 수 있을까? 『남아 있는 나날』은 자신이 몸담은 직업의 세계에서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살아온 한 남자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 생애 첫 여행지에서 인생을 회고하며 1950년대 영국의 사회상과 양차 세계대전을 지 나온 유럽의 세계정세를 교차해 인간의 삶과 세계를 연결 하는 점이 돋보인다. 인간의 보편적 정서인 일과 사랑, 직업윤리와의 내면 적 갈등을 한 인물의 삶 속에 투영해 읽는 이의 사유를 이 끄는 점도 흥미롭다. 다만, 시대의 흐름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로 주인공이 역설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자세가 진부하 게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럼에도 프로 정신을 갖춘 직업인으로 성장하고 싶 은 분들이라면 이 책이 건네는 메시지를 각자의 삶에 대입 해 통찰하며 성장의 동력으로 삼아볼 만하다. WRITER 김민숙 인문학 작가 77 2024. 12. December Vol. 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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