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법무사 1월호

난 그 자리에서 그의 귀띔을 아전인수(我田引水) 1 했다. 머잖은 날 남과 북이 손을 맞잡고 휴전선 철책을 걷어낼 것이라고. 남남북녀가 결혼하고 사돈 간 설왕설 래할 수 있으리라고. 그런 믿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부추길 만큼 어리석은 내가 아니라고. “응, 맏이와 둘째도 바로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다.” 아내의 무응답이 민망하여 얼른 내가 대답하였다. 그때다. 솟을대문 초인종이 요란하게 방정을 떨었다. “어무이, 장 바가 온다꼬 쪼맨치 늦었니더(어머니, 시 장 봐서 온다고 조금 늦었습니다).” 첫째 며느리인 안동 자부(子婦)다. 손에 든 저 신문 지 뭉치에는 영락없이 간고등어가 들어있으려니. 마지막으로, 기왕 열린 대문으로 뛸 듯이 달려오는 해남 아그 손에 들린 보퉁이가 유난히 크다. “오매, 쪼까 늦은 걸루 알았는디 허벌나게 늦었구만 이라(어머, 조금 늦은 줄 알았는데 많이 늦었네요).” “워쩌면 쓰갓는디(어쩌면 좋아)!” 예상했던 대로 보퉁이는 떠는 요란만큼이나 다양하 고 넉넉했다. 안동 자부 보퉁이가 간고등어를 제외하곤 농산물 일색이었다면, 해남 아그 보따리는 해·농 반반이 었다. 기(게)젓갈, 징게미(새우)젓갈, 뜨부(두부), 갓짐치(갓 김치) …. 보퉁이를 푸는 걸 금세 알아차린 파리, 모기가 극성 을 부렸다. “이누므 포리, 모구는 은제 왔당가!” 첫째 며느리나 둘째 며느리에 비해 막내 며느리는 물어오는 말씨나 물건 보퉁이가 거의 없다. 가로막은 철 조망이 헐린 지 오 년여에 불과하여 서로의 습속(習俗)조 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터이고, 그곳 살림살이도 ‘아직’이 라 물물교환은 언감생심이다. 친정 곳 말(言)조차 물어 나르는 걸 엄두 내지 못하여, 필요하면 그녀의 나그네(남편)인 아들놈이 통역을 한다. “시간 없다. 잡담 관두고 제사상들 차리거라.” 시어머니의 무뚝뚝한 이 한마디에 화들짝 놀란 며느 리들이 “위치로!”를 외치면서 굽고 데치고 지진다. 간만에 가회동 한옥이 시끌벅적하고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여러 번 마누라에게 “며느리들에게 좀 더 다정 하고 살가울 수 없느냐”고 타일러 봤지만 별무(別無) 효 과였다. “음식솜씨나 말솜씨나…, 워낙 비위가 상해서 당 최!” 맵거나 비리거나 짠 음식 맛과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모방 표준어에 대한 불만이었다. 시어머니의 심술은 하늘이 내린 시샘이라 했던가! 그 때마다 난 “세월이 약이겠지요”라고 마누라를 다독였다. • 어디 우리 며느리들이 보통 며느리인가! 황진이, 박연폭포, 서화담이 송도삼절(松都三節)2 일진데, 안동 자부, 해남 아그, 의주 미느리들이야말로 그 에 버금가는 “반도삼절(半島三節)”이 아니더냐! 연일 가화만사성만은 아니다. 지난여름 해남 아그가 친정을 다녀오면서 큰 홍어를 가져와 온 가족이 홍어회 파 티를 열었다. 난생처음 홍어회를 먹어보는 기대감에 들뜬 의주 미느리가, 손바닥만 한 회 조각을 덥석 입에 넣었다. 그러곤 냅다 자릴 박차고 일어나더니 연신 입에 손 부채질을 하면서, “내레 증말 맵습네다”라며 수선을 떨었 다. 그 바람에 온 가족이 배꼽을 쥐고 방바닥을 데굴데 굴 구르고 말았다. 그러나 ‘입맛 통일’은 ‘이념 통일’만큼이나 힘이 들 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는가 보다. 의주 미느리는 싱 겁고 달콤한 피자를 좋아하는 반면, 더 오랜 인연을 가진 큰 며느리는 속이 느글거린다며 오히려 맵고 짠 음식을 1 자기에게만 이롭게 해석하고 행동한다는 뜻. 또는 궤변을 늘어놓는다는 뜻. 2 개성을 대표하는 유명물. 80

RkJQdWJsaXNoZXIy ODExNj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