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에도 ‘고기 회식’이 존재했다. 조선후기 문 인 조수삼은 『추재집(秋齋集)』을 통해 “신라에서 새해 첫 날이면 임금 앞에서 ‘단향회(檀香會)’를 열고, 불을 피워 설야멱(雪夜覓)을 먹는다”고 언급했다. 여기서 ‘단향’은 박달나무로 만든 화로를 가리키고, ‘설야멱’은 대나무에 끼운 쇠고기 꼬치라는 뜻이다. “눈 내리는 날 밤에 구워 먹는 고기”라니 듣기만 해도 낭만적이다. 조선후기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를 보면 설야멱 레시피도 나온다. “넓고 길게 저민 등심살에 잔칼집을 내 고 꼬치에 꿴다. 숯불을 피운 후 재를 얇게 덮고 기름장 에 버무린 고기를 굽는다. 중간에 고기를 냉수에 담갔다 꺼내 다시 굽기를 3번 반복한다. 생강과 후추만 발라서 구워야 한다”고 묘사했다. 그런가 하면 구운 고기를 눈 위에 올려 식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복잡한 조리법을 사용한 이유는 화로만으로 불 조절이 어려워서였을 것이다. 자칫 양념이 타버리지 않도록 재를 덮어 화력을 약하게 했다. 구운 고기를 냉수 에 담그면 고기가 수축되면서 육즙을 가두고 씹는 맛을 좋아지게 만든다. 이후 석쇠와 번철이 보급되면서 꼬치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졌는데, 박지원이 먹었던 고기는 철판 구이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 고조선 시대부터 이어진 한민족의 고기사랑 양념한 고기를 구워 먹는 요리의 원형은 고조선 시 대 ‘맥적(貊炙)’으로 알려졌다. 맥적은 중국에까지 전해져 유행했다고 한다. 진나라 사서 『수신기』를 보면 “귀족과 부자들이 호상맥반(胡床貊槃)을 즐겨 사용하고 강자맥 적(羌煮貊炙)을 즐겨 먹는다”는 기록이 있다. 강(羌)은 티베트 계열의 소수민족, 맥(貊)은 예부여 와 고구려인을 말한다. 맥족이 사용하던 그릇이 맥반, 구 운 고기 요리가 ‘맥적’으로 ‘맥’이라는 명칭 자체가 고기 를 즐기는 민족이라는 뜻이다. 고려시대 원 간섭기에는 탐라의 쇠고기를 원나라에 진상했고, 고기 굽는 요리사 도 고려인이었다. 이쯤 되면 한민족의 DNA에는 유별난 고기사랑 유전자가 전해 내려오는 게 아닌가 싶다. 한반도에서 고기 요리가 특히 발달한 지역으로는 개성시가 있다. 고려왕조 수도이며 상업이 발달한 개성은 예로부터 호화로운 음식문화를 누려왔다. 박지원이 『만 휴당기』에서 난로회를 가진 장소가 바로 개성으로, 이 자 리에는 박지원의 절친인 개성 유수가 함께했다고 한다. 잠시 일상을 벗어나 친우와 고기, 술을 즐기는 이때가 그 에게는 힐링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 직접 고추장도 담갔던, 실학자의 소탈함 명문가 반남 박씨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박지원은 일찌감치 과거를 포기하고 평생을 야인으로 살았다. 늘 그막에 음서를 통해 안의(함양군) 현감으로 가게 된 그에 게는 자녀들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가족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박지원은 부인 이 씨 가 사망한 후에도 재혼을 하거나 첩을 들이지 않았다. 부 임지에서 그는 서울의 자녀들에게 편지 한 통을 보낸다. “고추장 작은 단지를 하나 보내니, 사랑방에 두고 밥 먹을 때마다 먹으면 좋을 거다. 내가 직접 담근 것인데 아직 잘 익지는 않았다.” 50대 가장이 직접 메주를 으깨고, 찹쌀밥을 짓고, 고춧가루로 양손을 발갛게 물들이며 장을 담그다니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한 실학자의 면모를 볼 수 있는 동시에, 자상한 아버지 박지원의 인간 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일화다. 고추장 외에 그는 육포 와 약고추장 같은 반찬거리를 분가해 살고 있는 자식들 에게 보냈다. 장남 종의가 감사인사도 없이 막 태어난 아 들자랑만 늘어놓자 박지원은 “이전에 보낸 쇠고기 장볶 이는 받아서 아침저녁으로 먹고 있니? 왜 한 번도 좋은지 어떤지 말이 없니? 난 그게 포첩(육포)이나 장조림보다 더 좋은 것 같더라”며 단단히 삐친 답장을 보낸다. 「허생전」, 「호질」을 통해 날카로운 풍자를 보여줬던 박지원도 뜻밖에 자식을 짝사랑하는 ‘보통 아버지’였던 것 같다. 친우와 한겨울 구운 고기를 즐겼다는 일화에서는 인 간적인 소탈함이 느껴진다. 새해를 맞아, 소중한 이들과 갖는 고기 회동은 예나 지금이나 그 온기가 여전하다. 83 2025. 01. January Vol. 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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