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로테의 남편 캐스트너에게서 빌린 것이었다. 두 개의 사연을 엮어낸 결과물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고, 이 작품은 괴테에게 문호로서의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괴테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의 예술적 감수성의 원천을 ‘연애’에서 찾는다. 샤를로테 외에도 괴테는 수많 은 여인들을 만났고, 그녀들과의 사랑은 작품 속에 반영 돼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파우스트」의 여주인공 ‘그레트헨’은 십 대 시절 괴테가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던 소녀이다. 연령대도 다양해서 어머니의 친구인 26살 연 상의 ‘주잔네 폰 클레텐베르크’라는 과부와 사귀기도 했 다. 이때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16세 연하의 ‘크리스티아네 폰 불피우스’는 괴테의 아내가 된 여인으로, 둘 사이에 아들 ‘아우구스트 폰 괴 테’를 두었다. 동거한 지 18년 만에야 정식 혼인했고, 결혼 9년째 되던 해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 무려 74세 때 괴테 는 17세 소녀인 ‘울리케 폰 레베초프’에게 청혼하기도 했 다. 하지만 울리케의 마음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존경에 가까웠고, 아들 역시 결혼을 반대해 맺어지지는 못했다. • 사랑만큼이나 괴테가 탐닉했던 초콜릿 사랑만큼이나 괴테가 탐닉한 대상이 있다. 바로 초 콜릿이다. 연인에게 청혼할 때도 초콜릿을 선물로 주었을 정도였고, 집에서 간식으로 먹는 초콜릿과 외출할 때 들 고 다니는 초콜릿이 따로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 초콜릿 은 꽤 고가품이었지만 금수저 집안 출신인 그에게는 큰 부담이 아니었다고 한다. 초콜릿은 ‘사랑’이나 ‘성욕’을 상 징하는 식품이기도 하다. 스페인 탐험가인 에르난 코르테스는 16세기 중반 아스텍에서 카카오콩을 처음 들여온 인물이다. 원주민이 먹던 초콜릿 음료는 쓰디쓴 맛을 지녔으며, 이름도 ‘쓰다’ 는 의미의 ‘쇼콜라틀’이었다. 하지만 이 낯선 음료를 마시 면 피로가 가시고 기운이 샘솟았다. 유럽인들은 쓴맛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설탕과 우유를 섞었고, 자양강장제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초콜릿을 섭취하면 신경전달물질인 엔도르핀과 도 파민이 분비되며 기분이 좋아진다. 페닐에틸아민이라는 화학물질은 사랑에 빠졌을 때 분비되는 호르몬 중 하나 로 알려져 있다. 마치 사랑에 빠진 듯 붕 뜨면서 설레는 것이다. 또, 초콜릿 속 옥시토신은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 나오는 물질로 친밀감과 유대감을 높인다. 이런 효능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희대의 바람 둥이 자코모 카사노바는 여성들에게 초콜릿 한 잔을 대 접했다고 한다. 교황청에서는 한때 초콜릿이 지나치게 이 성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고 흥분을 유발한다고 해서 금 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로맨티스트 괴테가 초콜릿에 빠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음료로 소비되던 초콜릿은 1679년 파우더 형태로 가 공됐다. 1828년에는 네덜란드의 제조업자 ‘판 후텐’이 카카 오 매스를 압착해 나온 지방으로 카카오버터를 만드는 기 술을 개발했다. 오늘날의 밀크 초콜릿 같은 제품은 1876년 스위스의 다니엘 페터와 앙리 네슬레에 의해 만들어졌다. • 우리나라 최초로 초콜릿 맛본, 명성황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초콜릿을 맛본 이는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로 추측된다. 당시 러시아 공사 부인은 서 양 화장품과 과자류를 명성황후에게 바쳤다고 한다. 국 산 초콜릿이 만들어진 것은 해방 후 경제 발전이 시작되 던 1968년경의 일로, 미국과 일본의 기술을 들여왔다. 오늘날 초콜릿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저렴한 간식이 됐다. 하지만 그 뒷배경을 알면 조금 씁쓸해질 것이다. 단 가를 낮추기 위해 사용되는 팜유는 포화지방이 많아 건 강에 해롭고, 대규모 팜 재배는 열대우림을 파괴한다. 또 카카오 산지에서 어린이들이 착취에 시달리며 수확한 열 매는 헐값에 선진국으로 수출된다. 뜨거운 사랑 뒤에 지독한 고통이 따르듯, 달콤한 초 콜릿 뒤에는 이런 어둠이 숨어 있다. 초콜릿이 오랫동안 전 세계 사람들을 매료시킨 이유는 이런 이중적 측면에 있을지도 모른다. 77 2025. 02. February Vol. 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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