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문화생활 법무사와 차 한 잔 전혀 예상을 못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이 형편없이 초라하리라는 것을. 예상한 대로 됫박만 한 장례식장은 아주 한산했다. 공진과 정극으로부터 전 갈을 받고 달려간 식장에는 역시 이들로부터 부음을 접 하고 온 망인의 친구 몇몇이 조객의 전부였다. 망자와 동년배에 해당하는 친구들이 조객의 전부이 고, 피붙이는 아예 한 사람도 없는 듯하다. 총각 신분에 다가 생전 행적이 그다지 모범적이지 못했던 그다. 가족 으로선 가슴으로만 울 뿐, 누군가에게도 그 슬픔을 내색 할 수 없을 것이다. 십일월이 끝나가는 강변 노을은 아름답기에 앞서 오 히려 스산하고 음산하기까지 하다. 고래고래 고함쳐 누군 가를 불러보고 싶지만, 강변에는 인적조차 찾아보기 힘 들다. 녹슨 저녁노을마저 어느 순간 지평선 아래로 가라 앉자 강물이 온통 먹빛으로 바뀌었다. 그나마 강변을 따 라 늘어선 몇 개의 구멍가게에서 흘러나오는 가녀린 백 열등 불이, 먹빛 강물 위에서 일렁여 준 덕분에, 지척을 구분할 수 있다. 알전구가 쏟아내는 불빛은 어둠을 밝히는 광명이 다. 광명(光明)의 자비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일행은 돌아 단편소설 무명초(無名草) 지다 가면서 -한 군데도 지나치지 않고-가게에 들러 소주를 샀다. 머나먼 길을 떠나는 벗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권주(勸酒)가 전부였기에. 망자와 조객들 간 생전관계는 학교 동기이거나 그 친구들이다. 서른 후반에 생을 마감한 망자를 두고, 동갑 내기 친구들이 그의 생전 자취를 운운한다는 것은 그야 말로 젖비린내 나는 푸념들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그 나 름 일생은 있을 것이다. 비록 무명초 일생이었을망정. 우리의 청년기 역시 지금 못지않게 출신 학교나 학벌 을 많이 따지는 시대였다. 지금보다 훨씬 대학 진학이 어 려웠고, 상경해서 다니는 건 더 큰 특권으로 여겨지던 시 절, 그는 서울 소재 대학을 -그것도 H대 미대- 졸업했다. 그 당시 미술이나 음악, 무용과 같은 예술 분야는, 재 능이 있다는 조건 하나만으로 선택을 할 수 있는 과목이 아니었다. 유치원에서 대학입시에 이르기까지 십오 년 가 까이, 레슨을 받아야만 간신히 입시 원서를 낼 정도였다. 게다가 졸업 후 바로 취업하기에도 불리한 과목이다 보니, 든든한 부모님의 탄탄한 재정지원과 본인의 질긴 근 민병영 법무사(대구경북회)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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