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법무사 3월호

성 없이는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영역이기도 했다. 다행히도 그는 SKY를 능가하면 했지 그 명성이 모자라지 않는 학교 를 졸업해서, 우리에게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대학 강단에 설 수 있는 품새라 속단할 수는 없어도, 중고등학교 미술교사 자리쯤은 떼놓은 당상이었으니까. 그런 그가 돌연 귀향(낙향?)한 속내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황금 세 말을 주는 직장보다 라면 한 그릇으로 점심을 때우고 낮잠을 즐기는 여유가 필요했던 그였다. 그런 적성에 맞춰 졸업 후 취업 대신 자영업으로 광고회 사를 차렸다. 광고 판촉을 위해 수차례 미국을 드나들기까지 했 으나 광고업은 오래가지 못했다. 폐업 원인에 대해 설이 분분했으나 분명한 것은 수주 실적 부진이나 판매 부진 이 아니란 것이다. 졸업과 동시에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서 자릴 잡 은 그의 대학동기들 전언에 의하면 여자 문제가 그 원인 이 아니었겠느냐고 했다. 현지인도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없으면 들르기가 쉽지 않은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수차례 그가 보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쇼 윈도 마 네킹을 닮은 노랑머리 아가씨와 팔짱을 끼고. 낙향 후 처음 그가 차린 아틀리에 위치는 목 좋고 번화하기로 소문난 동성로였다. 환쟁이 만드는 과정에서 무릎 관절이 닳고, 창업 뒷바라지에 등골까지 빠져버린 부모형제들에겐, 그의 귀향 자체가 악몽의 연장이었을 터. 아틀리에 오픈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적잖은 하객들 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그의 아버지가 내뱉은 말. “이 웬수 놈아, 이제 손 털었다.” 이후 그의 행적은 오리무중이었고, 뚜렷한 작품활 동이나 경제활동 없이 여러 해가 흘렀다. 보증금은 고사 하고 월세도 제대로 낸 적이 한 번도 없어 번번이 쫓겨나 야 했던 그의 마지막 아틀리에는 창고와 같이 음습하고 황량했다. 강변에서 불어오는 여름바람 서늘함이야 있어도 그 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아리다 못해 맵기까지 하였을 겨 울 삭풍을, 한 점 온기조차 없는 창고에서 버티기란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독자 전시회는 고사하고 합동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였다는 기별조차 준 적이 없었다. 그런 그를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곳은 중앙파출소 뒤 막걸리촌이었다. 그와 동석한 술자리에서 우리의 주 관심사는 술값을 누가 낼 것인가 따위는 그 축에도 들 수 없었다. 모두가 곤두세우는 촉각은 오늘은 누가 그로부 터 그림을 입도선매(立稻先賣) 또는 강매를 당할까 하는 것이었다. “내 돌무늬 그림 어때, 이런 그림 본 적 있어?” “수억 년 전 화석이 되살아난 느낌이지 않니?” 73 2025. 03. March Vol. 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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