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법무사 3월호

길을 붙들어 맨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진단이 오진이라는 걸 증명 이라도 하려는 듯 늠름하게 다시 술잔을 기울이곤 하였다. 그의 부음을 접한 것은 살얼음이 지피기 시작한 초 겨울이었다. 살갗에 와닿는 추위가 제법 맵게 느껴지는 그 겨울밤, 강변 아틀리에에 웅크린 그의 주검이 있었다. 시신을 발견할 당시 숨을 거둔 정확한 일자나 시각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젤에 엉겨 붙은 물감과 뻣뻣하게 굳어버린 화필은 물론이고, 캔버스에 쳐진 거미줄로 보아, 인적이 끊긴 게 꽤나 오래된 듯하였다. 언제 죽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되 우리가 본 그의 사인(死因)은 병사가 아니라 차라리 추위와 굶주림으로 보였다. 숨지기 전 곡기(穀氣)가 끊긴 것일까? 아님 시신으 로 바뀐 뒤 말라비틀어진 것일까? 가늠은 할 수 없으나 뼈에 붙은 살가죽은 신문지 정도 두께였다. 그런 일터요, 생활 터전을 죽어서도 그는 쉽사리 벗 어날 수 없다. 하룻밤을 장례식장에서, 그다음 날 반나절 을 화장장에서 보낸 뒤 아틀리에로 되돌아온 것이다. 지 척에 강물이 흘러 땅거미가 내리기 전에 거사를 치르기 에 더없이 좋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화실에 남겨진 30∼40호 정도 됨직한 그림 석 점이 최후의 삼무(三無) 여인에게 전달됐다. 무언, 무변, 무예 측에, 화장장까지 무덤덤하게 동행함으로써 일무(溢務) 를 더 한 자에 대한 예우로서. 이곳 놀잇배 대부분은 이인승이다. 어렵사리 사인 승을 찾아내 먼저 사무(四無) 여인부터 타게 했다. 그녀 의 손에는 만취한 그에게 찔끔거리며 따랐던 양주병 무 게의 절반 정도로 줄어든 ‘그’가 들려있었다. 삐그덕 삐그덕. 공진과 정극이 노를 저었다. 사무녀의 손에 들려진 나무 상자로부터 해방된 그가 살포시 강물에 내려앉는 다. 글라디올러스, 튤립, 릴리, 달리아…. 심지어는 양귀 비, 대마까지 숨어든 꽃밭에, 위세당당 자리했는데도 그 만이 이름을 얻지 못했다. 이름 없이 살다간 풀포기가 한 줌 재가 되어 가뭇없 이 길을 떠난다. 그의 부음을 접한 것은 살얼음이 지피기 시작한 초겨울이었다. 살갗에 와 닿는 추위가 제법 맵게 느껴지는 그 겨울 밤, 강변 아틀리에에 웅크린 그의 주검이 있었다. 이젤에 엉겨 붙은 물감과 뻣뻣하게 굳어버린 화필은 물론이고, 캔버스에 쳐진 거미줄로 보아, 인적이 끊긴 게 꽤나 오래된 듯하였다. 언제 죽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되 우리가 본 그의 사인은 병사가 아니라 차라리 추위와 굶주림으로 보였다. 75 2025. 03. March Vol. 693

RkJQdWJsaXNoZXIy ODExNj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