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문화생활 법무사와 차 한 잔 “이 칼로 자결하라.” 자세한 영문도 모른 채 대령한 사도세자에게 서슬 퍼런 장검을 내던지며, 노기등등 영조가 외친 일갈이었 다. 지금으로부터 262년 전인 1762년 7월 12일(영조 38 년 윤오월 21일), 창경궁 휘령전(현 문정전) 뜰 앞에서 벌 어진 일이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은 사도세자는, “마 마, 잘못하였사옵니다. 이제는 하라시는 대로 다 하겠습 니다.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이리 마옵소서.” 이를 문밖에서 숨죽이며 지켜보던 어린 세손이 달려와, “할바마마, 제발 아비를 살려 주시옵소서.” 세자와 세손의 간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비정한 아비는 끝내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다. 비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한여름 갈증과 배고픔, 엄습해 오는 죽음의 공포 속 절망감에 두렵고, 무섭고, 아프고, 괴로운 여드레를 버티다가 9일째 되던 날 사도 세자는 끝내 한 많은 스물여덟 생애의 청춘을 마감한 다. 수상 창경궁의 회화나무 사도세자의 죽음, 부왕의 기대와 당쟁의 희생양 학문보다는 무예 연마를 더 좋아하며, 북벌을 꿈꾸 던 비운의 세자는 그렇게 갔다. 역사상 왕권 쟁취를 위해 자식이 아비를 죽이거나 유폐시킨 일은 간혹 있었으나, 아비가 자식을 죽인 일이 있었던가? 영조는 조선왕조 최장수(83세) 왕으로 탕평책, 균역 법 등 치세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죽인 비정한 군주로 회 자된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배경에 대해서는, 세 손 시절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에게 간청하여 아비의 비 행을 기록한 사초(『승정원일기』)를 세탁하여 그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몇 가지 추론은 가능하다. 즉, 영조는 궁중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 소생의 비 천한 신분 콤플렉스와 장희빈의 아들이자 이복형인 경종 살해 설에 끝없이 시달렸다. 이러한 영조의 신분 콤플렉 스는 왕비 정성왕후와의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왕 비와 첫날밤 “손이 참 곱소.”라고 하자, “귀하게 자라 그렇 습니다.”라는 왕비의 대답에 천하게 자란 자신의 처지가 양상승 법무사(충북회)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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