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법무사 4월호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에 있던 ‘미츠코시 백화점’은 사치스러운 데이트를 즐기려는 모던걸과 모던 보이들이 자주 찾는 장소였다고 한다. 서양식 ‘난찌’를 먹 는 것은 여성들의 로망이자 데이트 필수 코스였다. 생전에 채만식은 어려운 살림에 쪼들리면서도 밥상 에 꼭 고기반찬을 올렸다고 한다. 한 번은 지인이 함께 식 사를 하다가 “자네는 채(菜)만식(食)이 아니라 육(肉)만식 (食)”이라고 농담을 한 적도 있다. 그의 작품에서 음식 묘 사가 상세하게 등장하는 것은 아마도 본인의 식탐이 반 영된 듯하다. 특히 그는 고기 산적을 가지고 한 편의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을 써내기도 했다. 직장을 잃고 굶주리던 화자는 아내를 전당포에 보 내 쌀을 사오라고 한다. 그런데 막상 사온 것은 작은 꾸러 미에 든 쇠고기였다. 전당포에서 오십 전을 받아 돌아오 다 한 선술집 앞을 지나게 됐고, 산적 굽는 냄새에 이끌 려 쌀 대신 고기에 돈을 써버린 것. 망연자실한 아내는 다시 바꿔 오겠다고 하지만 화 자는 태연하게 산적을 구워 먹자고 한다. 부부는 양념도 변변치 못한 산적을 맛있게 먹으며 “내일은 또 어떻게 헐 셈 치구”라며 유쾌하게 웃는다. 이 단편에는 그 시절 선술집 풍경이 직접 보는 것처 럼 실감나게 묘사됐다. 아궁이에는 두 개의 커다란 솥이 걸려 있고, 선반 위 도마에는 간장, 초장, 고추장 등 양념 주발이 놓였다. 술잔을 놓는 목로 맞은편에는 안주 굽는 화로가 있다. 뜨끈하고 진한 고기국물과 백탄불에 지글 지글 구운 산적은 술맛을 돋우는 데 안성맞춤이었을 것 이다. 고기 굽는 냄새는 술을 마시지 않는 아내마저 정신 을 놓을 만큼 유혹적인 존재였다. • 탕수육과 우동의 변천사, 1930년대 청요리 문화 채만식의 소설들은 일제강점기 음식문화를 탐색하 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레디메이드 인생」에는 여자 의 쭉 뻗은 다리를 보며 길쭉한 치킨가스를 떠올리는 장 면이 나온다. 양식이 한반도에 보급되기 시작한 시대 배 경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태평천하」 속 중국집 우동은 한국에 들어온 중국요 리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중국집 양대 강자는 짜장면과 짬뽕이 아니라 짜장면과 우동이었다. 중 국우동의 전신은 걸쭉한 ‘울면’이었다고 알려졌다. 녹말을 넣은 울면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렸고, 육수를 맑게 해달라는 손님들이 많았다고 한다. 중화요리에 일본식 이름인 우동이 붙게 된 것은 맑은 육 수라는 공통점 때문이다. 중국우동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인기 메뉴였으나 현재는 짬뽕에 밀려 마이너 한 존재가 됐다. 새빨갛고 매 운 짬뽕은 단숨에 한국인의 취향을 저격했고, 단맛이 강 해진 짜장면과 함께 중국집의 투톱으로 올라섰다. 탕수육의 원조는 중국 동북 지역의 ‘탕추리지(糖酢 里脊)’로, 구한말 산둥성 출신 화교들이 팔기 시작했다. 오 늘날의 탕수육과 비교하면 단맛 대신 신맛이 두드러졌고, 채소류는 들어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의 청요리는 어 지간한 부잣집이 아니면 엄두도 못 낼 만큼 고가였다. 「태평천하」 속 춘심이 기생들에게 탕수육을 대접한 것은 윤 영감의 재력으로 자신이 누리고 있는 호사를 자 랑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원고지를 넉넉하게 갖는 게 소원이었을 만큼 빈곤한 와중에도 채만식은 「레디메이드 인생」, 「치숙」, 「태평천 하」 같은 풍자적 소설들을 써냈다. 하지만 그도 일제강점 기 말에는 친일소설을 쓰고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강연 을 다녔다. 다만, 끝까지 변명에 급급했던 김동인, 이광수 등과 는 달리 그는 광복 이후 ‘「민족의 죄인」’이라는 소설을 통 해 친일 행적을 반성했다.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모습을 보면, 채만식의 경우 최소 한의 양심은 지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소설 속에 담아낸 고학력 백수나 시대에 편승 하는 기회주의자 등 인간군상은 오늘날 독자들에게도 기시감과 씁쓸함을 안겨준다. 77 2025. 04. April Vol. 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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