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법무사 6월호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중국에 가는 사신에게 ‘사 당, 빈랑, 괘양, 용안, 여지’를 가져오라고 했다. ‘사당’은 설 탕의 옛말로, 사탕수수가 나지 않는 조선에서는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가 병을 앓았을 때 설탕을 먹 고 싶어 했으나 찾을 수 없었고, 문종은 어머니의 영전에 뒤늦게 구한 설탕 단지를 올리며 눈물지었다고 한다. 왕 비도 쉽게 먹지 못할 정도로 귀한 음식이었던 것이다. ‘빈랑’ 열매는 대만·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껌처럼 씹 는 기호품으로 겉껍질은 약재로도 쓴다. ‘괘양’은 허브의 일종인 회향이다. 용안은 중국 남부지방에서 나는 포도 알 같은 식감의 과일인데 말려서 약용했다고 한다. ‘여지’ 는 그 유명한 양귀비가 가장 즐겨 먹었다는 과일이다. 당 현종은 그녀를 위해 여지 나무를 뿌리째 뽑아 배에 실어 왔다. 연산군은 또 사신에게 중국의 수박을 구해 오라고 했으나, 장령 김천령이 “우리나라 수박 맛과 크게 다르지 않고 가져오는 동안 부패할 수 있다”고 간언하자 후일 그 를 능지처참했다. 원하는 것은 반드시 가져야 직성이 풀 리는 왕을 두고, 후대 학자들은 연산군이 편집증과 같은 정신질환을 앓았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 흉년에 소고기 잔치, 태어나기 전 송아지까지 잡아먹은 연산군 육고기 또한 연산군이 즐겨 먹었던 음식이다. 그는 사슴의 꼬리와 혀를 전국에서 조달하도록 했다. ‘어두육 미’라고 해서 옛사람들은 지방질과 근육이 적절히 조화 돼 씹는 맛이 있는 꼬리 부분의 고기를 선호했다. 궁궐 이나 대갓집 잔칫상에는 반드시 소꼬리 찜이 올라왔다. 혀 역시 나오는 양이 적은 데다 식감이 좋아 고급 식재료에 해당한다. 연산군은 진상되는 꼬리와 혀가 부 족하거나 질이 떨어지면 지방관들을 고문하는 등 패악 을 부렸다. 연산군은 농업국가인 조선에서 금기시되는 식도락 을 즐기기도 했다. 바로 새끼 밴 암소의 태를 자주 먹었던 것. 농사 밑천인 소를 잡는 것은 금기에 가까웠고, 우유 역시 송아지의 성장에 방해된다며 왕의 보양식으로만 허 용됐다. 흉년이 들면 왕들은 소고기 반찬을 끊을 정도였는 데, 오히려 연산군은 잔치마다 소고기를 쓰라는 전교를 내렸으며, 태어나기 전 송아지까지 잡아먹는 만행을 자행 했던 것이다. 양기를 돋우는 이른바 춘약에도 집착했는데, 남성 의 양기에 좋다고 알려진 백마를 잡아오게 했다. 북쪽과 남쪽을 잇는 선을 ‘자오선’이라고 하는데 남쪽을 뜻하는 ‘오(午)’ 자는 ‘말’을 가리킨다. 그런가 하면 어린 노복들을 모아 귀뚜라미와 잠자 리, 베짱이를 잡아오라고 명했다. 잠자리가 양기를 돋우 고 신장을 보호한다고 믿었다. 메뚜기가 정력제로 통했 던 이유는 튼실한 뒷다리 때문이다. 이 밖에도 그가 진상을 요구한 식재료는 돌고래 고 기, 왜전복 등 끝을 모를 정도다. 『연산군일기』에는 “경기 감사에게 돌고래·자라 등을 산 채로 잡아 올리게 하다” 라는 대목이 있다. 그런가 하면 바다에서 산 고래를 잡아 오지 못했다며 지방관을 파직한 적도 있다. 식용으로는 큰 가치가 없다는 돌고래나 우리나라 전복과 거의 같은 일본산 전복을 찾은 것은 맛을 제대로 알기보다는 그저 희귀한 음식에 집착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는 후궁들에 대한 질투 와 분을 이기지 못해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실 수를 저질렀다. 그녀의 자제력 없는 행동을 보면 아들 연산군이 모후의 기질을 물려받은 것이라는 추측도 가 능하다. 더구나 식탐은 그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알고 타 락하기 전부터 있던 것이다. 어쩌면 연산군은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불행했던 사람이 아닐까. 77 2025. 06. June Vol. 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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