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아직 머물기도 전에 벌써 떠나버린 걸까. 어느새 기온이 뚝 떨어져 바람 끝이 제법 차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시청역 11번 출구로 나오니 서소문동 거 리가 눈앞에 펼쳐진다. 아직 물들지 않은 은행나무 사이로 새어든 햇 살이 회색 빌딩 유리창에 반사되어 반짝인다. 조금 걷자 ‘경서빌딩’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2025.10.20.) 내가 찾아갈 곳, 임욱빈 법무사 사무실이 자리한 건물이다. 임 법무사는 40여 년의 공직 생활을 마치고도 여 전히 법의 현장에서, 동시에 서예와 한시(漢詩)의 세계 에서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다. 나는 오늘 그를 만나 법 과 예술, 이성과 감성이 교차하는 삶의 이야기를 들어 보려 한다. 서예와의 첫 만남, 아버지의 만장(挽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정 갈한 분위기가 스며들었다. 벽면에는 서예 작품 한 점이 걸려 있었고, 그 묵향 속에서 한 사람의 삶의 궤적이 조 용히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임욱빈 법무사는 1978년 ‘법원 서기보’로 임용되어 2009년 ‘이사관’으로 승진, 사법연수원 ‘사무국장’으로 근무하다가 그해 말 명예퇴직했다. 이후 서울중앙지방 법원 ‘집행관’으로 4년을 근무했고, 2014년 법무사로 개 업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는 공무원 시절 서예수업을 시작했는데, 수많은 예술 중에서도 특히 서예에 깊이 빠져들게 된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이 있듯, 그의 이야 기는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아버지의 먹 향기 그윽한 서재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날 하교 후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지가 비단 위에 정성껏 붓으로 글씨를 쓰고 계셨습니다. 망자(亡 者)를 추모하는 글인데, 상여 앞에 세우는 만장(挽章) 을 쓰고 계신 것이었죠.” 아버지는 만장을 다 쓰고 난 뒤, 글을 청하러 온 이에게 그 의미를 풀어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한 사람 의 생을 기리고 남은 이들의 슬픔을 위로하는 그 엄숙 하고도 의미 깊은 의식. 소년 임욱빈의 눈에는 그 의식 의 중심에 서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멋있게” 보 였다. “그래서 훗날 저도 붓글씨를 쓰는 길을 걸으리라 마음속 깊이 다짐했답니다.” 그런데 법무사와 서예가는 공통점이 있을까? 법과 예술은 전혀 다른 분야인 것 같지만, 직관적으로는 공 통분모가 많다는 느낌이다. 임 법무사는 “법무사의 삶 이 서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묻자 이렇게 대답 했다. “법을 다룰 때처럼, 붓을 잡을 때도 마음가짐을 정 결히 하고 평상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 은 작품이 나올 수 없지요.” 임 법무사는 서예를 단순한 글쓰기 예술이 아니 라, ‘문방사우(文房四友)’를 통해 작가의 사상과 미적 감 정을 문자로 표현하는 동양의 조형예술이라 정의했다. 법이 인간 사회의 질서와 균형을 세운다면, 서예는 인간 마음의 질서와 조화를 세운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은 그의 일상 업무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사무장을 비롯한 세 명의 사무원과 협력해 사 무실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일상적인 등기 업무는 숙련 된 사무장을 잘 활용하고, 소장(訴狀) 작성과 같은 고 도의 논리와 정확성을 요구하는 작업은 직접 수행하고 있다. 법률 서류를 한 자 한 자 법리에 맞게 구성하고, 의 뢰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문장을 다듬는 과정은 마치 화선지 위에서 글자의 배치와 획의 균형을 고심하는 서 예가의 모습과 같다. 그의 사무실은 법률 서비스가 제 공되는 공간이자 수십 년간 법의 세계에서 체득한 질서 와 균형의 원리가 실현되는 또 다른 작업실인 셈이다. 49 2025. 11. November Vol. 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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