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가난한 집안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 다. 시골 초등학교를 마치고 K시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 했으나 가정형편상 도시진학을 포기하고 인근 면소재지 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시골은 정식 인가를 받은 학교가 드물었고, 고교 진학을 위해서는 검정고시를 거쳐야 했다. 중학교 졸업 무렵, 부친은 무학의 설움을 물려주지 않겠 다는 집념으로 단호한 결정을 내리셨다. “일단 검정고시를 치르고, 상고에 진학하도록 해라.” 인문계에 대한 미련이 있었 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상고에 입학했으나 주 산·부기 등의 과목은 도무지 적 성에 맞지 않았다. 학비 부담을 덜기 위해 야간학과를 선택하 고, 낮에는 신문배달을 했다. 그나마 위안이었던 건 영 어시간이었다. 해박한 실력과 문학적 감수성을 지닌 은사님 덕분에 영어에 흥미를 붙일 수 있었다. 교지에 실린 은사님의 회상록은 가난한 시절 자신을 도와준 은사님들에 대한 감사 로 가득했고, 필자의 마음을 깊 이 울렸다. 그러던 중 은사님이 행정고시 준비를 위해 학교를 떠나셨다. 힘들었던 시기에 정신적 지주였던 은사님과의 갑작스러운 이별에 나는 그 허전한 감정을 장문의 편지 에 담아 보냈다. 자취생활의 고역과 새벽 4시부터 시작하는 신문배 달의 고달픔, 구독료 수금 및 구독자 확장을 위한 영업활 동의 중압감, 비 오는 날 젖지 않도록 애쓰며 배달했던 월 220원의 신문대금 수개월분을 몽땅 떼먹고 이사를 가버 린 야속한 구독자에 대한 원망, 추운 겨울 감기몸살을 앓 으며 배달을 마치고 돌아온 자취방의 싸늘함과 막막함, 그 리고 도시생활에서 경험한 빈부격차의 거대한 장벽에 대 한 상실감 등을 적은 편지였다. 은사님은 편지를 꼼꼼히 읽으시고, 자신도 어려운 환경 을 극복해 오늘에 이르렀다며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말 라는 당부와 함께 영국의 신학 자 조지 허버트의 경구를 적어 보내주셨다. “희망은 가난한 자의 빵이 다.” 이후 은행원의 꿈을 접고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여 총무 처 행정직(현 7급)과 검찰직 시 험에 합격, 36년간의 공직생활 을 마친 뒤 법무사의 길로 들어 섰다. 그 시절 선망의 대상이었 던 은행원 친구들은 대부분 정 년을 채우지 못한 반면, 나는 정년보장과 퇴직 후 법무사로 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공무 원으로서 최선의 선택을 했다. 돌이켜보면 가난과 시련 속에서도 나를 지탱해준 버팀목은 언제나 ‘희망’이었다. 가난에서 벗어난 지금은 ‘가난한 자의 빵’에서 ‘살아 있는 자의 빵’으로 바뀌었을 뿐, 은사님이 적어주신 그날 의 경구는 여전히 필생의 좌우명이다. 요즘 경기 불황으 로 법무사업계가 어렵다고 하지만, 절망보다는 희망을 가 질 때 밝은 미래가 다가올 것이라고 믿는다. 슬기로운 문화생활 내 인생의 명문구 양상승 법무사(충북회) “ 희망은 가난한 자의 빵이다.” - 고교 은사님이 들려준, 조지 허버트의 경구 67 2025. 11. November Vol. 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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