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게 했을 때, 이번에는 유이치의 트랜스젠더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공유하 던 두 사람. 하지만 왠지 마음을 표현하는 데는 서툴기 만 하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각자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난 미카게와 유이치가 재회하는 모습이다. 며칠 동안 두부 요리밖에 못 먹었다고 하는 유이치를 위해 그녀는 따뜻한 음식을 품고 먼 도시까지 택시를 타고 달려간다. 서로를 향한 달달한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미카게의 음 식은 “먹어본 음식 중 가장 맛있었다”는 돈가스 덮밥이다. 서양 요리인 커틀릿에서 진화한 돈가스는 일본의 국 민 메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툼한 고기에 빵가루 를 입혀 튀겨낸 후 채 썬 양배추를 곁들여 내는 게 오늘날 일본 양식당의 기본이다. 돈가스 덮밥은 하얀 쌀밥에 돈 까스를 올리고 볶은 양파와 달걀, 쯔유를 붓는다. 달콤짭 짤한 쯔유와 고기의 육즙, 반쯤 입은 달걀의 부드러운 식 감이 조화를 이룬다. 한 그릇으로 간편하게 먹을 수 있어 바쁜 직장인들의 속을 든든하게 채우는 데도 제격이다. • 엄마의 마음을 담은 소박한 ‘일본 가정식’, 음식을 통한 소통과 치유 한때 일식이라고 하면 신선한 해산물과 고급 재료,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정교한 세공과 플레이팅이 연상 됐다. 국교정상화 이후 우후죽순 늘어난 일식집은 물고 기가 헤엄치는 수족관으로 볼거리를 제공하고 고급 접대 에 특화된 장소였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홍대나 망원동 등지에는 돈 부리, 카레라이스, 함바그 같은 가정식을 맛볼 수 있는 가 게들이 늘어났다. 요시모토 바나나가 작품을 통해 소개 하는 메뉴들도 주로 소박한 가정식들이 대부분이다. 음식에 대한 요시모토 바나나의 감성을 담은 「바나 나 키친」이라는 수필집도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는 반 갑게도 한국음식이 등장한다. ‘좀 시다 싶으면 찌개 끓여 먹어. 두부만 넣고!’라며 김치를 보내준 한국인 친구는 친절한 설명까지 해준다. 요시모토는 여기에 약간의 가공을 하는데 “두부가 없어서 중국식 장국에 백김치와 홍당무, 한국 김을 넣어 부글부글 끓였다”고 묘사했다. 약간 엉터리 같기도 하지 만 한국인 친구의 애정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던 듯하다. 일본 가정식은 대체로 양식과 일식이 결합된 형태가 많다. 오믈렛에 볶음밥을 싸먹는 오므라이스, 해군들의 각기병을 막기 위해 채소와 고기를 넣어 만들었다는 카 레라이스, 푹 익힌 면에 케첩과 소시지 등을 넣은 나폴리 탄 스파게티가 그 예이다. 서양인들이 보기엔 다소 뜨악 한 조합일 수 있으나 오래전 경양식 돈가스를 좋아했던 한국의 중장년층에게도 레트로한 감성을 느끼게 만드는 메뉴들이다. 「바나나 키친」에는 만화가인 친언니의 고로케 레시 피가 소개됐다. 튀김빵 속에 소를 넣은 한국식 고로케와 달리 일본식은 감자만을 넣어 반찬으로 먹는다. 생크림 이 듬뿍 들어가고 여러모로 건강에는 좋지 않을 것 같은 레시피지만 왠지 푸근함이 느껴진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유별난 도시락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과일과 김, 채소 등으로 예쁘게 꾸민 캐릭터 도시락 은 학교에서 아이들이 경쟁하듯 자랑하는 아이템이다. 그런데 요시모토는 거대한 알루미늄 도시락에 밥을, 타 파웨어 통에 고기를, 과일과 채소를 담은 삼단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다. 그녀의 밥 먹는 모습을 동급생들이 지켜 보는 일도 있었다. 예쁘거나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푸짐 하고 소박한 도시락에는 엄마의 마음이 담겼다. 이처럼 「바나나 키친」을 관통하는 주제는 ‘가족’이 다. 요시모토 바나나와 진보 사상가로 유명한 부친 요시 모토 다카아키, 언니인 만화가 하루노 요이코, 사실혼 관 계의 남편과 아들의 이야기가 ‘밥’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들은 음식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상처를 위로받 으며 살아간다. 추운 날 집에 돌아와 한 입 베어 무는 따 끈한 찐빵 같은 온기, 이것이 요시모토 바나나 문학의 가 장 큰 매력인 듯하다. 77 2025. 12. December Vol. 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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