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법무사 8월호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가 나를 알아줄 거라는 믿음은 엄밀히 말해 합리적이지 않은 생각이다. 오해를 양산하여 의사소통의 비효율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점차 개인화되고 파편화되는 현대사회의 인간관계에서 한국인들의 정(情)은 대단한 심리적 자원이 될 수 있다. 우리의 마음 습관과 변화하는 현실 사이에서 지혜로운 접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 문화심리학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가까운 사람들과의 대인관계에서 자신의 행위나 자신과 관련 된 사건에 대해서 상대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심적 경 험을 자기 자신의 경험으로 치환하여 ‘공경험(共經驗, co-experience)’하는 일에 민감하며 습관화되어 있다. 여기서 ‘공경험’이란 정서적 공감(empathy)과는 다른 의미로, 다른 이가 경험하는 내용을 마치 자신이 경험하는 것처럼 동시에 경험한다는 뜻이다. 즉 ‘공경험’은 다른 사람이 경험하는 인지, 정서적 내용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현재 상황에 대한 이해와 그 사람이 표현하고 있는 방식과 내용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말 그대로 상대방의 마음을 ‘말하 지 않아도 아는’ 것이다. 다른 이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동시에 경험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는 자신이 다른 이의 경험을 공경험하고 있다고 믿는 신념 의 체계가 존재한다. 이는 타인들의 경험을 자신의 입 장에서 해석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주관화(subjectify)’라 할 수 있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국인 심리 경험의 주관성이 완성된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한국인들의 의사소통은 이러한 신 념 체계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주관화’는 심리학에서 개인차를 만들어내는 원 인으로 꼽히고 있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배경과 지 식,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따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 을 경험해도 그 사건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이나 의미 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과정이지 만, 한국 문화의 어떤 점 때문에 한국인들은 주관화 과 정이 강조된 심리 경험 방식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한 국인들의 의사소통에서는 오해가 많이 발생한다.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며 억울해하는 일도 많고, 상대방 이 내 마음을 몰라준다며 서운해하는 경우도 많다. 정치인들마저 ‘오해다’가 다반사다. 국민을 심정 교류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제 생각으로 상대가 나를 이해해 줄 거라 믿는 것도 지극히 한국적 인 현상이다.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가 나를 알아줄 거라는 믿 음은 엄밀히 말해 합리적이지 않은 생각이다. 오해를 양산하여 의사소통의 비효율을 낳기도 한다. 특히나 인간관계의 질이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현대사회에 서 심정 교류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 커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초코파이 광고의 문구도 달라 졌다. 이제는 “말해야 알아요”의 시대다. ‘한국인의 정’은 심리적 자원, 현실과의 접점 찾아야 그러나 심정과 심정 교류의 의사소통 방식은 한 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산이기도 하다. 점차 개인화되 고 파편화되는 현대사회의 인간관계에서 한국인들의 이러한 마음 습관, 특히 정(情)은 대단한 심리적 자원 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나와 딱히 관계없는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 고, 내게 직접적인 이익을 주지 못하는 사안들에 참견 하고 오지랖을 부리며 마음을 나눈다. 세상이 과거와는 달라지면서 서로의 정을 의심해야 하는 순간도 있고, 서로 더 조심하고 신경 써야 할 부분도 늘어났지만, 기 왕에 가지고 있는 자산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도 있다. 모쪼록 우리의 마음 습관과 변화하는 현실 사이 에서 지혜로운 접점이 발견되기를 바라 본다. ┃ 슬기로운 문화생활 한국인은 왜 71 2023. 08 vol.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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