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법무사 3월호

71 2026. 3. March Vol. 705 나고 쾌활하다. 하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다르다. 유려하고 서정적인 동시에 낯설고 두렵다. 실로 아름다운 이 순간은 어떤 모험도 흥분과 즐거움 만으로 이뤄질 수 없으며, 거기에는 헤맴과 망설임, 그리고 통증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한다. 치히로의 모험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신들의 세 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다. 온천장의 주인 유 바바는 치히로를 ‘센’이라 명명한다. 이렇게 그녀는 옛 이름을 잃고, 새 이름으로 이곳의 생활을 시작한다. 이러한 설정은 인생의 단면을 예리하게 관통한다. 우리는 인생의 주요한 순간마다 새 로운 세계에 진입한다. 새로운 학교. 새 로운 직장. 우리는 그곳에 적응하기 위해 새 정체성을 입는다. 과거의 나와 닮았지 만 많이 다른 정체성을. 영화는 그것을 치히로의 새 이름, ‘센’으로 포착한다. 새 이름은 분명 생존에 더 유리하 다. 하지만 그 이름에 매몰되는 순간, 우 리는 과거의 자신을 잃고 만다. 영화에 서 자기 이름을 잊은 채 오로지 온천장 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이들처럼. 그 것을 일깨워 주는 이가 바로 ‘하쿠’다. 원래 이름을 잊으면 돌아가는 길을 잃 게 된다고 말이다. 하쿠의 정체는 의미심장한데, 치히 로가 어렸을 때 빠졌던 강이다. 치히로 가 하쿠의 본명(강의 이름)을 알려주며 그 역시 유바바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다. 서로를 아끼고 염려하는 이들의 마 음. 그것이야말로 현재에 매몰된 채 과 거를 잊고 살아가는 우리를 위기에서 구출해 낸다. 영화에서 치히로와 하쿠의 관계는 하나의 단어 로 압축되지 않는다. 하쿠는 치히로의 첫사랑이자 동 료이고, 스승이자 부모다. 혹은 그 무엇도 아니다. 다 만 이들이 과거에 순수하게 반짝이던 순간을 공유했 으며, 그 힘으로 현재에도 서로를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무엇이라 부르든 상관없어. 그 마음이 우리를 구 원할 테니. 나를 지키는 일은 지키고 싶은 시절을 기 억해 주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속삭인다. 우연히 빌 린 비디오를 가족과 넋 놓고 바라보았던 시절이 생각 난다. 내게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그런 존재 인 것 같다. 서로를 아끼고 염려하는 마음이 우리를 구원한다 12가지 마음에 건네는 영화 처방전 슬기로운 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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