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법무사 4월호

‘보여지는’ - 이중피동, ‘보이는’ - 쓸데없는 수동태 번역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날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매년 10월 말일만 되면 종일 듣게 되는 불후(不朽) 의 명곡인 이 노래의 제목은 모두들 아시다시피 「잊혀 진 계절」이다. 그런데 이 제목이 어법상으로는 맞지 않 는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그렇다. ‘잊히다’의 ‘히’가 피동(被動)의 의미를 가 지므로, 역시 피동의 뜻을 가진 ‘지’를 붙여 ‘잊혀지다’ 라고 쓰는 것은 이중의 피동 표현이 되어 옳지 않다. “잊 힌 계절”이 맞는 것이다. 지나친 지적이라고? 시적 허용(詩的 許容)이니까 그렇다 치자. 작사가를 문제 삼으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데 정치적 사건이나 화제(話題)에 대한 대담을 다루는 방송에서, 이른바 각계의 전문가들이 나와 “저는 이 사 건에 대해 이러저러하다고 보여집니다.”라고 말하는 것 을 들을 때는 화가 나기까지 한다. 이 표현은 두어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일단 ‘보이’는 것도 ‘잊히’는 것과 같은 구조이므로, ‘보여지는’이라는 이중피동의 형태를 쓰는 것은 오류라 는 점은 위와 같다. 그렇다면 “저는 …(라고) 보입니다.” 라고 말하면 되는 것일까? 당연히 틀렸다. 수동태로 쓸 이유가 없는 문장을 수동태로 썼기 때문이다. 굳이 추측해 보자면, “It is seen that ~” 정도의 영 나는 “본다”, “보여지”거나 “보이”는 것이 아니고 ‘잊혀진’, ‘보여지는’, ‘임산부’, ‘소위 말하는’, ‘할지 말지’의 바른 어법 법률가의 ‘바른’ 글쓰기 ② 어 문장을 흉내 내듯 수동태로 쓴 것이고, 그런 문장을 번역(직역)해서 쓰던 버릇이 우리말 표현에 침투한 것이 다. 그렇다면, “나는 … 보인다.” 대신 “나에게는 … 보인 다.”라고 하면 하자(瑕疵)가 치유된 것이 아닐까. 나의 해석의 주체는 나다. 데카르트(R. Descartes) 의 ‘코기토(Cogito)’를 빌려오지 않아도, 외부의 사물이 나에게 드러나는 감각, 지각의 영역이라면 ‘보인다’, ‘들 린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나의 생각·해석·주장이라면, 그것이 나에게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처럼 수동·피동 의 형태로 말하면 곤란하다. 생각하는 것은 ‘나’다. 그러므로 “나(저)는 이렇게 본다.”라고 말해야 맞는 것이다. 세존(世尊)의 가르침을 전하는 제자가 “나는 이렇 게 들었다(如是我聞)”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른 화법(話 法)이 필요한 것이다. 전문가들이여, 제발 자신의 권위 를 다른 곳에서 구하지 말고,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 다.”라고 논평하시길. ‘임산부’에게 자리 양보? ‘산부’는 갓 출산한 산모인데? 지하철을 타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약자(老弱 者)는 말할 것도 없고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자”는 캠페인(campaign, 로마군(軍)의 진영과 작전 등에서 72 율사삼인지언문 슬기로운 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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