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 제75권 제3호(통권 제777호) 연구논문 - 368 - 중화민국이 대만섬을 접수하였을 때 현지 주민들과 마찰이 발생할 가능성은 사실 이미 있 었던 것이다. 그런데 국민당 정부는 대만을 중국의 ‘성(省)’, 즉 가장 큰 지방행정구역 단위 중 하나로 삼았으면서도 본토의 여느 다른 성들과는 달리 해방된 국토라기보다는 점령 지역에 가깝게 통치하기 시작하였다.7) 그 한 가지 예로, 중화민국헌법이 이미 1947년 1월 1일자로 공포 되었음에도, 본토 국민당 정부가 임명한 행정장관은 1947년 1월 10일자 발표에서 ‘헌법을 대만성에 적용하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대만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너무 익숙하 여 정치적 역량이 발달되지 않아 입헌주의 체제로 바로 이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온전한 국민으로 대우를 받으려면 2-3년의 보호감독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8) 이러 한 입장은 나중에 철회되었지만, ‘인정과 풍토가 다르므로 메이지 헌법은 부분적으로만 시 행한다’고 하였던 일제의 식민정책을 연상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9) 또 다른 예로는 일 제가 실시하고 있었던, 일부 물자에 대한 전매 제도 등 통제경제체제를 없애기는커녕 본토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이를 오히려 강화하여 대만인들이 자신들이 수탈당하고 있다고 여기 게 만든 것이 있다. 이러한 국민당 정부의 통치 방침은 일제 치하에서 식민지인으로서 2등 신민의 지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대만인들이 품게 되었던, 동등한 시민으로서의 지위를 얻게 될 것이라는 희망과는 달랐던 것이다. 결국 1947년 2월 28일에 행상을 단속하던 경 찰이 총을 쏜 것이 기폭제가 되어 반정부 봉기와 이에 대응한 정부의 시민 학살이 벌어져 수만명 이상이 사망하는 이른바 2.28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이러한 일련의 전개는 중화 민국헌법의 제정과 적용에 있어서 대만인들이 소외되었다는 인식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게 만들었다. 2. 1948 - 1991: ‘임시조관’ 및 대만 계엄 국민당 정부는 중화민국헌법의 시행 후 불과 넉 달만에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을 정지시키 는 조치를 취하고 계엄을 선포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임시조관’이라는 이름의 긴급헌법을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임시조관’은 명목상 한시헌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40년이나 효 7) Wen-Chen Chang, 앞의 논문, p. 122. 8) George H. Kerr, Formosa Betrayed, Da Capo Press(1965), pp. 239~240. 9) 왕타이성, 양희철(역), “臺灣法의 近代性과 日本 植民統治”, 법사학연구(제27호), (2003. 4.), 7면; 문명기, “일제하 대만의 통치체제와 생활수준 - 일제하 조선과의 비교를 겸하여”, 한국학논총(제59권), (2023. 2.), 2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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